발리 한달살이 Day 25
돌아갈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돌아가기 싫어~라는 마음이 컸는데, 그건 그냥 안될걸 알면서도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인 거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함을 받아들이고 나니 내일 있을 코로나 신속항원검사에서 혹시라도 만에 하나 양성이 나오면 어떡하나 싶어졌다. 어느덧 한국에서의 일상을 이미 준비하고 있는 나.
하지만 다가오는 현실은 현실이고, 아직 나는 발리에 있으니까. 오늘 하루는 마치 장기체류자처럼 지내보기. 남편이 딸을 데리고 근처 워터파크에 다녀온다고 해 생각지도 않은 혼자만의 시간 획득. 오늘 내가 할 일은 두 가지. 근처 런더리샵에 세탁물을 맡기는 것과 세 번째 책을 다 읽는 것.
조식을 먹고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워터파크로 떠났고, 나는 구글맵을 켜고 Laundry Shop을 찾아 떠났다. 호텔에서 700m 거리.
포포인츠에서 지낼 때는 캠프 차원에서 세탁 서비스를 제공해주어 로비에서 전날 오전에 세탁물을 맡기고 다음날 오후에 찾았었다. 엄마들 중에는 개당 5,000 루피아(한화 약 450원)로 계산되는 캠프 제공 세탁 서비스가 비싸다며 근처의 훨씬 더 저렴한 곳을 찾아 맡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귀찮기도 하고 세탁물 자체를 많이 안 맡길 예정이라 세탁물을 들고 동네를 전전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아침에 세탁물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게 될 줄이야.
짧은 거리였지만 외국이어서 그리고 길치인 나에게는 언제나 긴장되는 처음 가보는 길이어서 꽤 멀게 느껴졌다. 딱 봐도 내가 세탁소를 찾는 사람처럼 보였는지, 가는 중간에 “런더리?”하며 나를 붙잡아 세우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또는 “택시?”하며 물어보기도 하고, “코리안?”하며 아는 체를 하기도 하고, “헬로~”라며 그냥 인사만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 나의 목적지는 Krisna Laundry 였기 때문에 그냥 눈인사만 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호텔에서 나와 두 번째 모퉁이를 꺾는 곳에서 발견한 표지판. 반가운 마음에 그리고 나중을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으로 남겨두고 런더리샵에 도착. 현지인 아주머니는 인사도 뭐도 없이 내가 들고 온 세탁물의 무게를 재고는 3kg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후 영수증 같은 종이를 내밀고 이름과 호텔 칸을 가리키길래 기입을 하고, 오늘 저녁에 찾을 수 있냐, 몇 시까지 오면 되냐 물어보니 “until 7”라고 했다. 금액은 60,000 루피아. 포포인츠에서 12개를 맡기는 것과 동일한 금액. 어차피 오늘은 무게로 계산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개수를 굳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2개보다는 많았던 것이 확실하니 조금 더 싸게 맡긴 걸로.
아무튼 오늘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마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씻으며 잠시 고민을 했다. 오늘 시간이 난 김에 타투를 할까 싶어서였다. 발리에 유독 많은 것 중의 하나가 타투샵과 거의 전신에 타투를 한 사람들이다. 타투를 한 사람을 한국에서보다 많이 봐서인지 발리에 오기 전 내 몸에 새긴 3개의 타투는 정말이지 티도 하나도 안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에 조금 더 추가해도 과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주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동물이구나.
세탁물을 맡기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타투샵 간판에 쓰여있던 인스타 아이디로 검색을 해보았는데 전신에 타투를 한 좀 험상궂어 보이는 아저씨가 나왔다. 디엠을 보내볼까 하다가 어쩐지 조금 겁도 나고 혹시라도 의사소통이 정확히 안되어 원하는 대로 새겨지지 않으면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라 한국에 돌아가서 하기로 하고 노트북과 책을 챙겨 들고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를 하나 시켜 한국에서와 똑같이 시간을 보냈다.
스타벅스에서 남은 반, 그리고 룸으로 돌아와 나머지. 세 번째 책(죽은 자의 집 청소)도 마저 다 읽었다. 오늘 할 일 모두 완료!
3시 반쯤이면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과 딸이 오지 않자 슬슬 심심도 하고 걱정도 되어 4시쯤 톡을 보냈더니 오는 중이란다. 5시간 동안 각종 워터 슬라이드를 14번 타고 돌아온 둘이 좀 쉴 동안 나는 아까 맡겼던 세탁물을 찾으러 갔다. 구글에 영업시간이 7시까지라고 되어 있어서 늦어도 7시까지 오라는 말로 이해를 했기에 5시즘 가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5:10 즘 가게 앞에 가서 보니 문은 닫혀 있고 CLOSE 표지판이 안에서 걸려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우선 5분 정도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구글에 나와있는 번호와 영수증에 적혀 있는 번호, 가게 옆쪽 나무로 된 표지판에 적혀 있는 번호로 모두 전화를 해보았지만 연결이 안 되거나 등록이 안되어 있는 번호라고 했다. 아, 머릿속은 점점 더 하얘져갔다. 돈을 내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세탁물을 못 찾게 되면 어쩌지? 맡긴 옷은 대부분 딸과 남편 것이라 둘의 원성을 꽤나 사겠구나 싶었다.
그때 현지인으로 보이는 어떤 남성이 가게 앞으로 왔다. 나는 처음에 가게 관련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도 세탁물을 찾으러 온 사람이었다. 아무튼 나와 동일한 처지에 놓인 현지인이 나타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가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하자 그가 잠깐만 기다려보라는 손짓을 하며 문을 세게 두드리며 현지어로 뭐라 뭐라 하니 저쪽에서 어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나왔다.
둘이 한참을 얘기하더니 그 아저씨가 나 보고도 오라는 손짓을 한다. 따라가 보니 세탁소 옆에 딸린 가정집이 보였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탁물이 4 덩이 정도 놓여있는 곳에 내가 맡겼던 가방도 보여 안심이 되었다. 세탁물을 찾고 돈을 지불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역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 세탁물을 맡기러 갈 때나 찾으러 갈 때는 안 보였던 담장의 그래피티가 그제야 보여 잽싸게 사진을 찍었다.
세탁물을 룸에 잘 넣어두고 그때부터는 다시 관광객 모드. 고젯으로 택시 불러 스미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근처 바닷가를 산책하고 마사지받고 돌아오기.
처음에 글의 제목을 현지인 코스프레라고 적었다가 장기체류자 코스프레로 바꾸었다. 나의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현지인은 세탁물을 돈 주고 가게에 맡기거나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앉아있거나 무엇보다 하드락 호텔에 묵을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얼레벌레 거의 한 달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한 달을 살아본 나는 장기체류자에 속하는 걸까? 나는 말할 것도 없고 12살 딸도 외국에서 한달살이 이만하면 충분히 잘 해낸 것 같다. 다음에 더 긴 해외 장기여행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시간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