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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만화가 Nov 19. 2024

20세기의 영화

나는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을 친할머니와 보냈고, 세상만사를 다 귀찮아하는 할머니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덕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등을 바닥에서 떼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 인생 제일의 미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가 끝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대자로 누운 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게 내 일과였다.


직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저녁을 차려주면, 입 짧은 시어머니처럼 느릿느릿한 젓가락질로 밥그릇을 비우고는, 다시 같은 위치로 돌아가 똑같은 자세로 리모컨을 돌렸다.

 

구슬땀을 흘리며 정글짐을 오르는 아이들이 부러웠던 내 어머니는 나를 열심히 놀이터로 내몰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끄럼틀 사이에 설치된 해먹 위에서 세상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어머니는 활발하고 귀염성 있는 어린이로 나를 기르겠다던 다짐을 깔끔하게 접으셨다.

 

결국 내 또래 아이들이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지며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동안, 나는 TV 스크린으로 보이는 왜곡된 세상을 통해 인생관을 확립해 가는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큰아버지는 서울에서 비디오 대여점을 했는데, 명절이 되면 남는 비디오테이프를 한 아름 들고 내려와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그때 받았던 비디오들이 아직까지도 내 인생의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다.


잘 나가던 만화 영화들은 재고가 쌓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받았던 비디오테이프들은 대부분이 유명한 만화 영화의 속편, 그 속편의 속편이었다.

 

덕분에 나는 [티몬과 품바 2]를 [라이온킹]보다 먼저 보았고, [알라딘]보다 [알라딘 3]를 먼저 접했다.


[티몬과 품바 2]는 티몬과 품바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공짜 벌레 뷔페를 여는 뱀들이 나오는 만화영화다.


[알라딘 3]는 알라딘의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그는 유명한 도적의 왕이다.


그리고 가끔 중국에서 제작한 30부작, 혹은 40부작짜리 대하사극의 일부가 만화영화에 섞여 내 손에 들어오기도 했다.


[수호지], [의천도룡기], [황제의 딸] 같은 것들이었던 것 같다.


[삼국지]도 몇 편 있었는데, 재생해 보면 하나같이 이미 제갈공명이 죽은 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대체 제갈량이 죽고 난 다음의 [삼국지]를 누가 본단 말인가?


어쨌건 그때 내가 봤던 만화와 영화들은,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인생의 아주 중요한 선택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 홀로 집에 2]를 수 십 번 돌려본 아이는 일찌감치 유학의 꿈을 가지게 된다.


성룡 영화에 심취한 소년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낙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주성치 영화에 빠진 어린 씨네필들은 허허실실이야말로 여자의 마음을 사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라이온 킹]은 어떤 방향으로든 어린이를 미래의 생태주의자로 만든다.


내게 큰 영향을 끼쳤던 영화 중에 [솔드아웃]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원제는 [Jingle All The Way]인데, 한국 수입사 측에서는 [Sold Out]이라는 단어가 더 영화의 주제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마저도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솔드 아웃]이라고 읽는 바람에, 어린이 입장에서는 당최 뜻을 알 수 없는 영화 제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영화를 만든 이는 브라이언 레반트 감독이다.


브라이언 레반트 감독은 [고인돌 가족]과 [베토벤]을 찍은 가족 영화의 거장이다.


[고인돌 가족]은 브라키오 사우루스로 만든 미끄럼틀이 나오는 영화다.


[베토벤]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던 천재 작곡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커다란 개가 나오는 영화다.


네이버 영화 카테고리에서 [솔드 아웃] 항목을 들어가 보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프로필을 볼 수 있다.


신바드, 필 하트먼, 리타 윌슨, 그리고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나온다.


이들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멈추는 법 없이 흘러갔음을 느낄 수 있다.


영화에서 얄미운 우편배달부로 나왔던 신바드는 이후 코미디 전문 배우가 되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아내로 나왔던 리타 윌슨은 배우활동과 영화제작 활동을 병행하는 중견 영화인이 되었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필 하트만은 슬프게도 98년 이후로 영화에서 얼굴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안타까운 이는 아널드 슈워제네거인데, 그는 점점 이상한 길로 빠지더니 결국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는 불행을 겪게 되고 만다.


신기하게도 나는 내 주변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을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평범하디 평범한 가장인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터보맨’ 인형을 사주기로 한 아들과의 약속을 그만 깜빡하고 만다.


크리스마스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그는 ‘터보맨’ 인형을 구하기 위해 시내의 모든 장난감 가게를 뒤진다.


그러던 중 그는 같은 이유로 시내를 헤매고 다니던 우편배달부 신바드를 만난다.


‘터보맨’ 인형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신바드가 이 영화의 메인 악역이다.


두 명의 아빠, 그리고 하나의 ‘터보맨’ 인형.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위한 두 아빠의 대결이 시작된다.


뭐 그런 이야기이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영화에 악당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한 명,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아내에게 집적대는 옆집 남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영화의 줄거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지금도 나는, 만약 이 세상에 유토피아가 있다면 [솔드 아웃]의 세계와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주인공도, 악역도 모두 일상적인 곤경에 처한 평범한 사람의 몫이다.


유토피아에서 진짜 악당은 단지 엑스트라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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