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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만화가 Nov 12. 2024

슬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미국의 코미디 작가가 한 명 있다.


나는 언제나 그가 비극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글은 하나같이 슬프기 때문이다. 


독일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무사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집에 들어서자, 그의 배불뚝이 삼촌이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도 남자가 됐구나!” 


그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독일인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엄청나게 재미있으면서도 엄청나게 슬프다고 생각한다. 


그의 글을 사랑했던 독자들은 그가 슬픈 얼굴로 유머러스한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독자들이 자신이 슬픈 얼굴로 유머러스한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글을 써나갔다. 


그러다가 충전이 되면, 아주 조금씩 진짜로 슬픈 이야기들을 읊조렸다. 


감사하게도 나는 건강한 신체와 하루 세끼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고정수입이 있지만, 그럼에도 인생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비극이다. 


인생은 근처에서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치밀한 비극이다. 


과거는 슬프다. 


현재는 고통스럽다. 


미래는 두렵다. 


하늘에서는 불운이 장맛비처럼 내리는데, 우리는 그 속을 우산 하나 없이 헤쳐나가야만 한다. 


나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와! 이런 걸 버티는 사람이 세상에 70억 명이나 있다니!” 


그러면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등산객들이나, 식탁에 아이스크림을 쏟아놓고 그대로 가는 손님들을 보면서도 새삼 감탄하게 된다. 


비극은 마치 피구공 같아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날아든다. 


우리는 비극을 받아내거나, 피해야만 한다. 


두 손으로 비극을 받아내면, 엄청나게 고통스럽다. 


비극을 피하면, 내 근처에 있는 누군가가 그 공에 맞게 된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 둘 밖에 없다. 


나는 미국의 독일계 코미디 작가의 글을 보면서, 유머야말로 이 피구 게임을 길게 연장시킬 수 있는 제3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삶에서 웃음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피구공으로 저글링을 하는 것과 같다. 


게임을 멈추지는 못하지만, 저글링은 나와 내 근처에 있는 누군가가 잠깐 동안 숨을 돌릴 시간을 벌어준다. 


그렇게 당분간 숨을 고른 후에야, 우리는 진짜로 슬픈 일들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가까웠던 많은 사람들은 내가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한 후에 세상을 떠났다. 


덕분에 나는 3일 동안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곳에서 잠을 자면서 그들의 인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 비극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의 먼 친척 분은 십 년이 넘도록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모셨는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던지 많지 않은 나이에도 치아가 다 빠져 버렸다. 


그리고 결국 모시던 시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내 외할아버지는 70년 만에 정상적인 청각을 되찾으셨는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뇌에 물이 차는 병에 걸리셨고, 자신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셨다. 


그들의 삶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그 비율로 따지면 맛 김 위에 뿌려진 소금 알갱이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는, 나의 먼 친척과 외할버지가 낄낄거렸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시간과 에피소드의 편린들을 모아서, 그것들로 열심히 저글링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면, 다시 피구공을 받거나 피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게임오버가 선언된 후 당당하게 피구장을 떠나갔다. 


나는 아직 그들이나 미국의 독일계 코미디 작가처럼 숙련된 피구선수가 되지 못했다. 


때때로 나는 지나치게 정직하게 피구공을 받아낸다. 


때때로 나는 지나치게 약아빠진 태도로 피구공을 내 주위 사람들에게 넘긴다. 


이따금 그냥 게임을 그만두고 집에 가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함께 놀다가 혼자 집에 가버리는 것은 반칙이기 때문이다. 


남은 방법은 열심히 저글링을 하다가, 가끔씩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밖에 없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내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아무도 나에게 고통스러운 행동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누구도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나를 불안에 떨게 할 미래의 씨앗이 하나도 새로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는 누구에게도 피구공을 던지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날은 정말로 흔치 않다. 


그러니까 오늘은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야만 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조금 슬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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