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 지역감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장소에서 태어나서 스무 살에 서울로 올라왔다.
세상이 서서히 바뀌어가던 때였고, 스스럼없이 서로를 욕하던 사람들이 미묘하게 바뀌어 가던 사회 분위기를 감지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내 외할아버지는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로 가게 된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달력 뒷면에 한반도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가로, 세로로 남한 땅을 4등분 한 뒤, 4 사분면에 빗금을 칠했다.
“여기에서 온 애들 아니면 말도 섞지 말거라.”
나는 스무 살이었고, 아직 사춘기의 부기가 다 빠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른들의 옳지 못한 행동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는데, 그날은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아버지가 시킨 밭일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할 정도였다.
내가 입학 후 목포에서 온 아이와 함께 기숙사를 쓰게 되자, 고향 친구들은 자신이 직접 겪었다는 흉흉한 일들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가 하루빨리 그들의 의견에 부합하는 에피소드를 만들어 오기를 고대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분명 그때 내가 함께 방을 썼던 목포에서 온 아이는 어마어마한 병신이었지만, 뭐, 스무 살 난 남자아이는 원래 그런 법이다.
어마어마한 병신이긴 했지만, 목포에서 온 룸메이트는 마음이 따뜻했다.
내가 위염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먹으라면서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다 주기도 했었다.
어쨌건 나는 서울에 올라오고 난 지 몇 년이 흐르도록 지역감정의 실체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땀이 뚝뚝 떨어질 만큼 더운 날이었다.
동아리에서 알게 된 한 선배가 풋살을 하자며 나와 친구들을 불러냈다.
짜장면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우리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우리는 탕수육과 깐풍기를 상상하면서 공을 차고 받았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선배는 우리에게 묻지도 않은 채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내게는 아주 오래된 독특한 습관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장면을 절대 비비지 않는 것이다.
선배는 소스가 묻지 않아 노란색이 다 보이는 자장면을 입에 밀어 넣고 있는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맛있니? 하긴, 과메기나 먹는 땅에서 올라온 놈이 맛을 알 리가 없지!”
나는 한참을 생각해 본 후에야 그 선배가 광주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선배는 일종의 지역비하를 한 것이다!
마침내 한국 사회의 뒷면에 자리 잡고 있는 축축하고 추악한 편견의 섬광을 보았다는 생각에,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들뜬 기분이었다.
그 뒤로는 누군가가 ‘지역감정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야!’라고 말하면,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꼭 그렇게 만은 단정 지을 수 없어.’라고 허세를 떨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그때 그 선배는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지금은 아내의 고향인 부산 동래구에서 치과를 경영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내게도 광주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가 볼 기회가 생겼다.
별로 친하지 않은 지인의 결혼식이었지만, 나는 앞장서서 내가 축의금 배달을 담당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선배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전라도 본토 음식을 내가 한 번 먹어보리라.’
뭐, 그런 심정이었다.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잡아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축의금을 내고, 신부입장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식장을 빠져나와 뷔페로 향했다.
결혼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누구 결혼식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젊은 시절 나에게 핀잔을 주었던 광주 시민의 음식 자부심을 내가 무참히 밟아주리라는 마음 밖에 없었다.
친구들에게 들은 게 있었던 나는 자리를 잡자마자 육전을 찾아다녔다.
“여기, 육전은 어디 있습니까?”
내 물음에 연어를 정돈하고 있던 직원은 손을 뻗어 김치전과 꼬마김밥 사이에 있는 나무 소쿠리를 가리켰다.
노란 계란 반죽이 입혀진 손바닥만 한 크기의 고동색 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오로지 육전만을 접시에 담아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부모님의 원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육전을 째려보며 젓가락을 이용해 음식을 잔인하게 난도질 한 뒤, 가장 두툼한 부위를 집어 들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입을 다무는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역시 음식은 남도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