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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ong Nov 11. 2022

퇴사작정기  #1 퇴사에도 작정이 필요하다

매일 품는 소망을 현실의 계획을 갖기까지.

직장인 모두는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산다고 했다. 우스갯소리로 무심코 흘려버리던 말을 간절하게 곱씹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즈음부터 우리 부부의 식탁 위에서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대화가 하루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그러게. 이렇게 출근하고 퇴근하고 자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이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었지. 하지만 다 그렇지 않나.”

“그렇겠지..대부분 다 이렇게 견디고 살겠지.”

“하지만 그래 이렇게 살거면.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 질문들은 오래 곱씹다보면 살기 어렵게 만든다. 


때로는 그냥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게 만든다. 왜 살까,라는 질문도 그렇다.대뜸 물어보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참 이 질문에 골몰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우리의 경우에도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정답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도, 사그러지지도 않았다. 뭐,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맥주 한 모금과 꾹 삼켜낼수록, 괜히 우리 좀 징징거리는 것 같다고 웃으면서 그 질문을 쫓아낼수록 튀어올랐다. 온 힘과 무게를 실어 꾹 눌러뒀던 스프링이 튕겨오르듯이 아주 센 탄성으로 꾸준히, 선명하게.


문득 한 계절을 건너뛰어 계절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던 어느 출근하던 날의 아침에. 죄송하지 않은 일에 수없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던 순간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왜 이 업무까지 제가 해야합니까’ 하고 수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하고도 막상 내 이름을 부르는 상사 앞에서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고 네네, 하고 대답하고 뒤돌아서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출퇴근에 좇기다가 나도 모르게 가족의 생일이나 내 생일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일기를 쓰지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생각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꾸만 튀어올랐다.

왜 살지?

왜 살까.

사실 그 질문을 곱씹다가 결국엔 깨달았다. 


그 질문의 앞에는 어떤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이렇게 살거면) 왜 살까. 였다.

그리고 질문을 다시 한 번 솔직하게 번역하면 이랬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는, 평생, 살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든 지는 몇 년 되었다. 하지만 밥벌이는(생각보다도 훨씬!) 숭고하고 중요해서 쉽게 그만두거나 팽개칠 수 없는 거였다. 게다가 모두가 선망까지는 아니어도 납득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하고 시험을 친 그 시간들을 함부로 내팽개칠 수 없었다. 막상 나와서 매월 들어오는 월급이 없는 삶의 막막함을 쉽게 마주하기는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0의 상태로 돌아가 죽어라 노력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핑계를 대며 버텼다.

아직은 적응을 다 못해서일지도 모르니까.

다들 이렇게 사니까. 나만 힘든 건 아니니까.

다른 선택지로 옮겨간다고 해서 과연 다를지 모르니까.


그렇게 우리는 그 대화를 반복하면서 또 네 계절을 보냈다. 새로운 해가 되었고 연차가 조금 더 쌓이자 적응한만큼, 아니 적응한 것보다 한두겹 정도 조금 더 두껍게 업무가 주어졌다.


힘들어? 그런데 있잖아. 내년은 더 힘들거야. 


그런 직장인 괴담에 가까운 대화가 진실이라는 걸 깨닫던 즈음, 펜데믹에 시작되었다. 나는 9년차, 남편인 m은 5년차 공무원인 시점이었다. 집에 칩거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게 하는 전세계적 재난상황에서 다시금 철학적 질문을 맞이하게 되면서 우리는 더는 질문을 삼킬 수 없었다. 아니, 질문을 삼켜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마음 어딘가가 깨져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어디 좀 고장난 것 같지 않아?”

“응, 그런 것 같아. 이상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은 주인공이 (아주 조금이라도) 갈등 상황에 처하게 되는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을 볼 수 없어서 스킵하거나 끄기 일쑤였고, 선의나 사랑을, 꿈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직 동화속이네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와, 저렇게는 되지 말자던 어른의 얼굴을 꼭 닮아있었다.풍광 앞에서 감탄은커녕 아무런 감흥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한 때 여행을 좋아한다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게 무색하게 어떤 풍경 앞에서도 별 다를 것 없다고 말했다. 운전을 하다가 쉽게 화가 치밀어올라 험한 말을 결국 입말로 내뱉고 말았다. 사람들은 작은 흠결도 화가 치밀어올라 속으로 욕했다. 영화와 노래와 사소한 디테일에서 취향의 세계를 구성하던 것들은 사라지고 나만의 생각과 개성도 사라졌다. 사는 게 바쁘면 다 그렇지라는 말로 퉁치면서. 다들 그렇게 사니까 적당히 사람들과 잘 어울렸지만 진심은 언제나 반절만 걸치며 무난한 동그라미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라는 사람을 변별하는 속내도 사라졌다. 마음도, 생각도 사라졌다.


여기까지 였다면 다들 그렇게 산다고 또 삼켰을까. 하지만, 어느날부턴가 출근 알람을 들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보도블럭에서 다가오는 버스를 보거나 운전을 하다가도 도로의 끝지점을 보면서 이대로 끝나버려도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마음만 그런가 할 때즈음 몸의 여기저기서도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이 지경이 되고나서야 우리는 질문을 바꾸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버티지?

이 일이 아니면 정말 안될까?

여기서 퇴사하면 정말 밥벌이를 할 방법이 없나?

그렇게 질문을 바꾸고 나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만두자. 더 이상 우리가 몸담는 이 곳의 우리를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지 않는다. 살게 하지 않는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물이 모이던 컵의 물이 왈칵, 흘러넘치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작정했다.

그만두자. 꼭, 그만두자. 시간이 흘러서 어쩔 수 없이 관성으로 일하는 어른이 되지 말자. 누군가를 이렇게 쉽게 미워하면서 살지는 말자, 우리.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퇴직하자.


우리는 어깨를 치고 급하게 지나가던 사람의 피치 못할 사정을 상상하며 괜찮다던 서로의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냥 올려다본 구름의 모양을 한참 감탄하며 바라보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살고 싶은지 밤을 새서 속삭이던 목소리를 알고 있으니까. 적어도 내 삶이, 하루가, 말 한마디가 타인에게 온기가 되고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던 떨리는 목소리 또한 우리의 것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작년, 봄과 여름의 계절을 통과하면서 퇴사를 작정했다.


퇴사에는 그 무엇보다도 작정이 필요했다. 작정과 작정할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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