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큼 힘들어야 힘듦을 인정할 수 있을까?
"출근하고 싶나요?"
첫 문장을 읽고 눈살을 찌푸렸거나 미쳤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밥벌이의 숭고함을 매순간 느끼면서, 자기를 또는 가족을 함께 먹여살려온 사람. 찐으로, 진심으로 일을 해온 사람.
청년실업이니, 생계 위협이니 단어들이 메인 뉴스가 된지 오래지만,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의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임은 틀림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을 둘러보면 출근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을 하는 게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직장인'은 보지 못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든, 안정성을 추구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든, 또는 적어도 경제력이 일순위라 고되지만 보상받는 일을 하고 있든 그랬다. 다들 출근하기 싫다고 고개를 가로 저었고, 한바탕 수다가 끝나고 이야기의 소잿거리가 떨어진 순간이면 로또 당첨이나 주식 대박 같은 소망을 내비치며 퇴사를 꿈꿨다. 일을 하고 싶다고 말을 하는 이는 취업을 준비하는 이, 일을 준비하는 사람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쉽게도 아직 '일'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 말이다. (경제력의 문제는 별개로 두기로 한다.)
그게 문제였다.
사실 퇴사를 떠올린 지는 오래 전 부터였다. 은연중에 이렇게 평생 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퇴사를 '작정'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 정도 일을 지속해온 사람이라면, 찐텐으로 일을 해온 사람이라면 대개 나만큼은 고장나 있었으니까. 우리의 '고장남'은 일을 오래도록 진심으로 해온 사람일수록 대개 겪어본 경험이었으니까. 그 사실이 나의 작정을, 우리의 결심을 방해했다. 현실의 퇴사를 위해선 적어도 누가 뭐라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확신 정도는 가지고 싶었는데, 그게 가장 어려웠던 거다.
현실을 지속하기 위해서 매일 밤 털어넣는 맥주 한 잔 정도의 위로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퇴사'를 무게로 가지려면, 지금의 나의 고장남과 괴로움이 어떤 객관성이 증명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없었다.
우리에겐 객관적 지표나 바로미터 같은 게 필요했다. 가끔 상상했다. 퇴사측정값 따위가 있어서 일을 하는 사람들 중 당신의 업무는 얼마만큼 과중되어 있고 얼마만큼 지쳐있는지, 그래서 종합적인 분석 결과 당신이 퇴사를 하는게 합당한지 그런 걸 설명해주는 지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퇴사측정지수
10 지금 당장 퇴사하세요.
8-9 퇴사 준비를 시작하세요.
6-7 견뎌보세요.
4-5 당신은 럭키, 현실을 잘 살아가세요.
그런 바로미터가 있었다면 깔끔하고 간편하게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나는 이정도로 힘들다고 세상에 증명해보이고 머뭇거림없이 퇴사를 선언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도, 세상이란 것도 너무도 입체적이고 복잡해서 (그놈의 사바사, 케바케!) 그런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힘듦의 척도도 각자의 마음이 견뎌낼 수 있는 탄성도, 회복력도 다 달라서 뭐라고 객관화시키기 어려우니 문제다.
어쩌면 이 문장을 읽는 누군가는 안힘들어봐서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경지가 온다고. 그럴 수도 있다. 당신의 힘듦과 나의 힘듦은 결코 동일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서로를 수없이 오해하며 대화할 뿐, 완전하게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으므로. 결국 이해란 각자의 영역이니까.
'도대체 얼마만큼이어야 하지?'
그 생각을 하느라고 시간이 또 흐르고 흘렀다. 하루는 길고, 일 년은 빠르게 흐른다. 결국 해내야 하는 업무와 업무 사이를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뛰다보면 또 연차가 일 년 더 늘어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하고 운명적이게 펜데믹이 덮쳤다. 그 속에서 나와 남편 m은 칩거하며 질문에 대해 골몰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알게 됐다.
이미 선을 넘었구나. 내 마음의 바늘은 위험 경계를 넘나들며 깔딱이고 있다. 남편m의 경우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있었다 바늘이. 곧 바늘이 꺾일 지경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우리는 겨우 퇴사를 작정할 수 있었다.
퇴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작정'하는 것도 그렇게나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나도, m도, 내 주변의 사람들도 대개 그랬다. 내 주변의 특성일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 정확하게 결정을 내리고 말하는 걸 잘 못한다. '확신'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퇴사든, 그게 무엇이든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대신에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일이다. 깔딱깔딱, 당신의 마음이 어떤 경계선을 넘어가고 있는지 아닌지. 괜찮다고 눙치며 넘어가는 중인지, 아닌지. 앞으로 얼마만큼 견딜 수 있을지. 아니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잠깐의 힘듦에 눈이 가려진 것인지.
퇴사의 바로미터는 바로 마음 안에 있었다. 너무 교과서적이고, 뻔한 말이지만 왜 교과서가 교과서고 뻔한 말이 왜 수없이 회자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모든 건 다 자기 마음안에 있었다. 늘 그렇듯 모두가 아는 뻔하고 쉬운 사실, 정설은 실천하기가 언제나 어렵다.
결국 펜데믹이라는 특수 상황이 겹쳐지고 나서야, 우리는 마음 들여다보기에 성공했다. 이 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도 한 번즈음, 자신만의 바로미터기로 마음을 측정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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