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하지 않는 강요
.가짜들에 대한 분노가 연민으로 바뀔 때쯤,
이제는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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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니체의 말처럼 ‘진짜’라는 단어가 촌스러움의 지위로 떨어지고, ‘진짜’를 추구하는 가치가 위선과 허세 또는 시대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이상주의로 취급받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진짜’라는 단어에 ‘훌륭한’이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는 한, 그동안 시대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개인에게 강권해 왔던 것이 실은 개인을 과도하게 억압하는 폭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밝혀진 마당에, 그러한 폭력을 함께 행사한 공범이라는 의심은 피해 갈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진짜는 신뢰를 잃었으며, 그 반동으로 가짜는 진짜의 부재를 대신한다. 그리고 이내 가짜는 진짜를 대체한다. 무엇인가로부터, 내가, 지금, 만족했다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아니,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인 일이며, 중세부터 현재까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불필요한 ‘가짜’ 규범에 놀아나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은 관심이 없다.
마침내 시대는 어둠을 벗어나 지혜 획득했다. 설혹 어떤 일이 기만이라도 상관없다. 대신 그것으로부터 어떤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기만은 이기적인 것이 속성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에게는 때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이며,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혹 그것이 생산자와 소비자 중 누구에게라도 ‘경제적’이라면, 대부분의 기만은 초월적 당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흐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됐다. 역사에서 이 파도는 순환과정 속에서 등장했지만, 이 번에는 그에 대한 반기가 없다는 것이 다르다.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환경에서 ‘우리’를 외치며 드는 반기는 도태와 추방을 요청하는 것과 다름없고, 극한까지 원자화된 현실은 그 어디에도 온정이 담길 부피를 허락지 않기에, 다시 또 그에 대한 반기는 용기가 아니라 객기이거나 시대착오적 구태이고 추태가 된다. 그렇게 니체의 말은 현실이 되고, 가치의 전도는 주체와 원본인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존재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미 존재와 당위를 획득한 소위 ‘(가짜였던) 현실’은 변화 가능한 타협의 상대가 아니라 절대적 복종의 대상이다.
사회의 원자화는 그런 현실의 하나이다. 애초에 사회의 원자화는 ‘폭력적 억압자로서의 사회’의 권위를 박탈하는 진정성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가속화되는 사회의 원자화는 이미 개인의 마음에 대한 원자화까지 이르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은 여전히 사회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있고, 본질적 자유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새로운 현실로부터, 새로운 사회 분위기로부터, 새롭게 허락된 범위에 다시 종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사실상의 구속이 자유로 가장되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가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수의 동의와 현실은 강력한 당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짜는 마침내 완전한 진짜의 지위를 획득한다. 그것은 대체가 아니라 동일화다. 가짜와 진짜의 구별은 시대의 추한 편견으로 추방되었다. 무엇이든 그 자체로 원본이 된다. 그렇기 원본에 대한 진위 확인의 시도는 이제 역사로 박물 되어야 한다. 그렇게 모두를 인정함으로써 원자는 더욱더 쪼개지고 마침내 극한의 완벽한 붕괴에 이르러 그 과정은 완성된다. 결국 개인은 모두가 될 것이며, 그렇게 모두는 하나가 될 것이다. 다시 니체의 말이 승리의 단상을 기웃거린다.
‘우리’는 그렇게 ‘나’로, ‘나’는 그렇게 ‘모두’로 전도顚倒된다. 그리고 또다시, 그 과정은 더욱더 만족할 수 있도록 반복되어 정제된다. 이제 만족의 주체는 ‘힘에의 의지’이다. 그렇게 영원의 회귀 속에서 ‘권력(힘)’은 ‘우리’로부터 권력(힘)을 쟁취하게 된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주어진 현실이라는 가상에 협력해야 하는 것인가? 결국은 소크라테스의 주문은 모두 틀린 것이기 때문인가?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 강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 속에 들리는 비명들은, 더 강력해진 서로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 위에서 서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목소리 인지도 모른다.
201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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