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39개월
"엄마 이것 좀 봐! 내가 티비에 그림을 그렸어!"
슈베르트의 [숭어] 멜로디가 울리기에 세탁실로 가서 건조기 문을 열었다.
더운 기운이 훅 하고 느껴진다.
까치발을 들고 뜨끈한 빨래더미를
앞이 보이지 않도록 한아름 끌어모으고 있는데
그런 내 등에 대고 아이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외친다.
"엄마! 내가 티비에 그림 그린 거 좀 볼래?"
'잘못들은 거겠지...'
티비라니, 우리 집엔 티비가 없다.
대신 한쪽 벽을 가득 채워 빔프로젝터를 쏜다.
그런데 무슨 그림을 그려, 어디 그릴 데도 없는..
"그림을 그렸다고?"
빨래더미를 다시 건조기 안으로 밀어 넣고 돌아서자
입안 가득 하얀 치아를 잔뜩 드러내 보이며 이히히히 웃는 아이,
그리고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녹색 크레용.
'으악'
"어디? 태은아, 어디 그림을 그렸어?"
"여기! 이것 좀 봐, 엄마! 멋지지?"
토도도 달려가 빔프로젝터가 틀어진 벽 앞에 착 붙어 서며
자랑스럽게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있었다,
빙글 뱅글 아무렇게나 몇바퀴 그어진 녹색 크레용 자국.
나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서
망연자실 빈 눈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고 태은아...."
속도 모르고 까르르 깔깔 웃고 있는 화면 속 베베핀을
대신 한 번 째려봤다.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태은이는
기대한 반응이 없자
순간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나를 빼꼼 올려다봤다.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 힝 엄마 기분 풀리면 좋겠다..."
라고 했다.
'지우개로 지워볼까? 아니야, 더 번지기만 하겠지. 하 어떡하지...'
생각에 잠겨 멍하니 서있는데
내 앞으로 바짝 서서
배꼽에 얼굴을 파묻고 갑자기 노래를 시작한다.
"우리 엄마 기분 풀려라~
우리 엄마 기분 풀렸으면~
엄.마.가 기분 조.와.지.면 조켓따!"
풉.
"엄마 웃었네?
내가 노래해서 그런가?
내 노래가 마~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