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사소의 곁 15화

"애들은 놔두면 알아서 커~"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니까!"

by FONDOF

2023년 4월,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







"꽃이 언제 피는지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

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나는 이 노래가 그렇게 좋더라.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쨍한 느낌으로 쏘아붙이는 권정열의 목소리,

그리고 찌질할 정도로 날 것을 담아낸 가사.


과연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뭘 꽃놀이를 가, 아파트 화단만 봐도 널린 게 꽃인데..'


하지만 엄마가 된 후로는

각종 꽃들 전국의 개화시기를 꿰뚫고

지도앱 별표를 빽빽하게 채워 넣는

내가 되어버렸다.



요 작은 인간의 커다란 눈망울 가득 예쁜 꽃을 담아주고 싶어서.




그렇게 저장한 곳 중 하나인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에 가는 날이다.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조성, 관리되는 곳으로

봄철과 가을철, 1년에 두 번만 한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을 맞이하시던 관리인분께서

유모차를 보시곤 환하게 웃으시며 어서 오라고 손짓해 주신다.

그 기꺼움에 나도 과장되게 머리를 푹 숙였다 올리며 인사드리니

허리를 굽혀 태은이와 눈을 맞추시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생각지 못한 환대를 받아 황송한 마음으로 들어선다.






자박자박.

운동화 신은 발이 흙길을 박차는 소리.

어떻게 이렇게 기분 좋은 소리가 있을 수 있을까.

오감을 일깨워주는 리듬이다.

나는 어느새,

언젠가 끝없이 걸었던 산티아고 길에 다시 서있는 기분이 된다.


"태은아, 이 소리 들어봐. 자박자박. 자박자박.. 어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야."


수목원의 나무들은 자유로우면서도 단정했다,

빗질 한 번 안 해도 찰랑이는 소녀의 머리카락처럼.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걸었다.


길 왼 편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오솔길이 흘렀다.

저 멀리 만개한 진달래의 연분홍이

마치 모네의 붓질처럼 번져 보인다.


걸음이 빨라진다.






길은 이제 야트막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완만한 경사이지만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올라가려니

양팔을 쭉 뻗고 몸을 최대한 낮춰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다.

느려진 속도에 아이가 고개를 쑥 내밀어 나를 돌아본다.


"아이쿠, 아기가 여기까지 왔네~ 신통해라!"

하는 낯선 목소리와 함께 유모차가 쑤욱 밀려 올라간다.

짙은 다홍색 아웃도어룩, 하의는 같은 채도의 진파랑이다.

등산모에 스포츠 선글라스, 배낭까지 메고 오신

50대 후반쯤?

친근하게 옆에 서서 유모차를 밀어주는 몸이 날렵하다.


감사합니다~ 인사드리는데

"몇 개월 이래? 잘 생겼네! 너 엄마 덕에 좋은 구경 한다!"

넉살 좋게 발걸음을 맞추며 동행을 자처하신다.

등산용 스틱을 쥔 두 손이

거의 겨드랑이 높이까지 올라가 있다.



"애기 하나예요?"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빈 눈을 껌뻑,

감았다 다시 떴다.


"에이그~ 둘은 있어야지! 나는 애가 셋인데!"

엄지로 새끼손가락을 누르며 숫자 3을 만들어 보이는 모습이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이미는 아이처럼 자랑스럽다.

"하나는 안돼~ 외로워 외로워. 하나 더 있어야 해!"


아이를 키우며 겪는 다반사,

적당히 눈웃음에 난처한 제스처를 담아

아하하 네...

딴청을 피워본다.


"일단 낳으면 애들은 놔두면 알아서 커~ 우리 애들도 지들끼리 거저 컸다니까?"


나는 새삼 그를 찬찬히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누군가 이쑤시개로 눌러 만든 듯한 팔자주름이

한쪽만 올라간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호기가 퍽 맘에 드는 듯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고 있다.


"아 네.. 부인분께서 고생 좀 하셨겠어요."


나는 나지막하게 할 말은 하고

(일단 낳으면, 이라니.)

괜히 한 번 태은이를 들여다보는 척

물 줄까? 하며 잠시 유모차를 세웠다.

가방을 뒤적이며 슬쩍 눈치를 주는데

본인도 같이 멈춰서는 경치를 둘러보고 있다.



물병을 가방에 넣으며 유모차를 민다.

다시 원치 않는 동행이 이어진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 갑자기

쿵!

커다란 돌부리에 바퀴가 걸려

태은이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아이구! 괜찮아? 애기 안 다쳤어?"

내가 놀랄 새도 없이,

아니 오히려 나를 침착하게 만드는 호들갑,

아니 뭔가 나를 나무라는듯한.

안전벨트 하고 있어서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그러게 애들은 하여간~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니까!"



'놔두면 알아서 크지만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아, 나는 그와의 동행을

한 걸음도 더 이어갈 자신이 없다.

더는 이 독개구리 같은 패션의 중년남성에게

우리의 첫 꽃놀이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가 자신의 세 아이가 자라면서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민첩하게 아이들을 구해냈었는지에 대해

신나게 썰을 푸는 동안,

나는 못 들은 척 힘든 척 정신없는 척 핸드폰 보는 척

온갖 척을 해가며 걸음을 서서히 늦춰

드디어 그를 저만치 앞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왔던 길을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다시 돌아갔다.






챡-챡-챡-챡 챡-챡-챡-챡

bpm180 정도로 땅을 박차다

점차

자박

자박자박

자박...


원래의 템포로 돌아와 비로소

"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났다.







#수요없는_동행공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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