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니까!"
2023년 4월,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
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나는 이 노래가 그렇게 좋더라.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쨍한 느낌으로 쏘아붙이는 권정열의 목소리,
그리고 찌질할 정도로 날 것을 담아낸 가사.
과연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뭘 꽃놀이를 가, 아파트 화단만 봐도 널린 게 꽃인데..'
하지만 엄마가 된 후로는
각종 꽃들 전국의 개화시기를 꿰뚫고
지도앱 별표를 빽빽하게 채워 넣는
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저장한 곳 중 하나인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에 가는 날이다.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조성, 관리되는 곳으로
봄철과 가을철, 1년에 두 번만 한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을 맞이하시던 관리인분께서
유모차를 보시곤 환하게 웃으시며 어서 오라고 손짓해 주신다.
그 기꺼움에 나도 과장되게 머리를 푹 숙였다 올리며 인사드리니
허리를 굽혀 태은이와 눈을 맞추시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생각지 못한 환대를 받아 황송한 마음으로 들어선다.
자박자박.
운동화 신은 발이 흙길을 박차는 소리.
어떻게 이렇게 기분 좋은 소리가 있을 수 있을까.
오감을 일깨워주는 리듬이다.
나는 어느새,
언젠가 끝없이 걸었던 산티아고 길에 다시 서있는 기분이 된다.
"태은아, 이 소리 들어봐. 자박자박. 자박자박.. 어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야."
수목원의 나무들은 자유로우면서도 단정했다,
빗질 한 번 안 해도 찰랑이는 소녀의 머리카락처럼.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걸었다.
길 왼 편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오솔길이 흘렀다.
저 멀리 만개한 진달래의 연분홍이
마치 모네의 붓질처럼 번져 보인다.
걸음이 빨라진다.
길은 이제 야트막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완만한 경사이지만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올라가려니
양팔을 쭉 뻗고 몸을 최대한 낮춰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다.
느려진 속도에 아이가 고개를 쑥 내밀어 나를 돌아본다.
"아이쿠, 아기가 여기까지 왔네~ 신통해라!"
하는 낯선 목소리와 함께 유모차가 쑤욱 밀려 올라간다.
짙은 다홍색 아웃도어룩, 하의는 같은 채도의 진파랑이다.
등산모에 스포츠 선글라스, 배낭까지 메고 오신
50대 후반쯤?
친근하게 옆에 서서 유모차를 밀어주는 몸이 날렵하다.
감사합니다~ 인사드리는데
"몇 개월 이래? 잘 생겼네! 너 엄마 덕에 좋은 구경 한다!"
넉살 좋게 발걸음을 맞추며 동행을 자처하신다.
등산용 스틱을 쥔 두 손이
거의 겨드랑이 높이까지 올라가 있다.
"애기 하나예요?"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빈 눈을 껌뻑,
감았다 다시 떴다.
"에이그~ 둘은 있어야지! 나는 애가 셋인데!"
엄지로 새끼손가락을 누르며 숫자 3을 만들어 보이는 모습이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이미는 아이처럼 자랑스럽다.
"하나는 안돼~ 외로워 외로워. 하나 더 있어야 해!"
아이를 키우며 겪는 다반사,
적당히 눈웃음에 난처한 제스처를 담아
아하하 네...
딴청을 피워본다.
"일단 낳으면 애들은 놔두면 알아서 커~ 우리 애들도 지들끼리 거저 컸다니까?"
나는 새삼 그를 찬찬히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누군가 이쑤시개로 눌러 만든 듯한 팔자주름이
한쪽만 올라간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호기가 퍽 맘에 드는 듯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고 있다.
"아 네.. 부인분께서 고생 좀 하셨겠어요."
나는 나지막하게 할 말은 하고
(일단 낳으면, 이라니.)
괜히 한 번 태은이를 들여다보는 척
물 줄까? 하며 잠시 유모차를 세웠다.
가방을 뒤적이며 슬쩍 눈치를 주는데
본인도 같이 멈춰서는 경치를 둘러보고 있다.
물병을 가방에 넣으며 유모차를 민다.
다시 원치 않는 동행이 이어진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 갑자기
커다란 돌부리에 바퀴가 걸려
태은이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아이구! 괜찮아? 애기 안 다쳤어?"
내가 놀랄 새도 없이,
아니 오히려 나를 침착하게 만드는 호들갑,
아니 뭔가 나를 나무라는듯한.
안전벨트 하고 있어서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놔두면 알아서 크지만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아, 나는 그와의 동행을
한 걸음도 더 이어갈 자신이 없다.
더는 이 독개구리 같은 패션의 중년남성에게
우리의 첫 꽃놀이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가 자신의 세 아이가 자라면서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민첩하게 아이들을 구해냈었는지에 대해
신나게 썰을 푸는 동안,
나는 못 들은 척 힘든 척 정신없는 척 핸드폰 보는 척
온갖 척을 해가며 걸음을 서서히 늦춰
드디어 그를 저만치 앞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왔던 길을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다시 돌아갔다.
챡-챡-챡-챡 챡-챡-챡-챡
bpm180 정도로 땅을 박차다
점차
자박
자박자박
자박...
원래의 템포로 돌아와 비로소
"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났다.
#수요없는_동행공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