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잠가도
경기도 의왕의 한 농장체험 비닐하우스
등이 배기도록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난 일요일이었다.
언젠가 남편이 내게 요즘 소원이 뭐냐 묻길래
[한 열일곱 시간쯤 자버리기]라고 대답한 적이 있는데
그 후부터 남편은 나의 늦잠을
자신의 사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부스스 거실로 나와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30분,
대충 냉동실에 있는 만두를 꺼내 찜기에 넣고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정성껏 차린 음식이 맛없는 일은 거의 없지만
대충 차렸다고 해서 맛이 없을 리가?
더없이 훌륭한 주말 아침 식사를 하며
오늘은 어딜 갈까- 네이버 지도앱을 켠다.
아이랑 가볼 만한 곳을 하나 둘 주황색 별표 저장해 놓은 게
어느덧 551군데.
오늘은 안 가봤던 곳으로 가고 싶다,
편도 30분 정도 선에서 찾아보자... 오, 농장체험?
오늘의 낮 최고 기온은 27도, 좋았어.
예약 열려있나? 오후 3시 30분 타임 비어있다, 좋았어.
후기를 좀 살펴보자.. 선생님들이 친절하시다.. 재방문각? 좋았어.
감자 캐기, 샤인 머스캣 따기, 방울토마토 모종 심기, 거북이 밥 주기.. 좋았어, 결제!
집에서 30분 거리지만 1시간 전에 출발하자,
그래야 출발 후 넉넉잡아 20분쯤 뒤에 낮잠 들 테고
30분 재운 다음에 깨우면 딱 시간 맞게 들어가겠다!
무계획으로 일관하는 내 삶이지만
이렇게 분 단위로 계획적이 되는 분야, 바로 육아.
이런 내 모습을 접할 때마다 매 번 낯설어하는 남편에게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해 주며 운전대를 맡겼다.
분명 고속도로였는데 차가 심하게 덜컹이길래
보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 밖을 보니
갑자기 논뷰가 펼쳐졌다.
벼가 저녁 6시 경의 햇살처럼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알알이 꽉 찬 벼를 보며 논길을 천천히 들어가니
미리 마중 나와 계신 젊은 청년 선생님이
이 쪽으로 차를 대라고 친절히 맞이해 주신다.
부스스 잠이 깬 아이가
"다 왔어? 나 감자 먹을래!"
횡설수설 기지개를 켠다.
카운터에서 다른 인상 좋은 선생님이 예약확인을 하며
앞치마와 바구니 등을 나눠주셨다.
안 쪽으로 마련된 테이블에 가족 별로 자리 잡고
포도 담을 종이 그릇에 색연필로 그림도 그리거나
기니피그와 토끼들에게 당근을 주며 프로그램 시작을 기다린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감자 캐기 진행하겠습니다. 초록 바구니를 들고 모여주세요."
확성기 안내 방송을 듣고 10 가족 정도가 우르르 약속한 장소에 모였다.
진짜로 캐는 건 아니고 모래 속에 미리 숨겨놓은 감자를
아이들이 손으로 파내며 찾을 수 있게 세팅되어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신나는지 고사리 손으로 열심히 모래를 파서
제법 알이 굵은 감자를 발견하곤 여기저기서 환호를 터뜨린다.
직접 캔(!) 감자를 종이봉투에 4~5개 따로 챙겨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이걸로 엄마가 감자볶음 해줄게! 하자
맛있겠다! 외치던 아이의 얼굴이 더없이 밝다.
한편에 마련된 낮은 수돗가에서 스스로 손을 씻고
안쪽으로 자리한 제법 큰 모래놀이터에서 한참 놀다가
다음 프로그램 시간이 되면 다시 모여서
포도를 따러 옆 비닐하우스도 다녀오고
앵무새들 새장에 손을 넣어 모이도 주고
방울토마토에 대해 배워보고 모종을 큰 화분에 옮겨
파란색 코끼리 물조리개로 물을 담빡 주었다.
"생각보다 너무 양질인데?"
"그러게, 시간 진짜 잘 간다. 또 오자!"
직접 따온 포도가 너무 맛있다며 우적우적 먹는 아이를 보며
남편과 나는 만족의 대화를 나눴다.
그때,
돌아앉은 내 등 뒤에서 쏟아지는
옆테이블 엄마가 무차별 말폭탄을 쏟아부었다.
"준희! 눈 똑바로 떠 왜 그렇게 흘겨떠? 이렇게 딱 앞을 보라고!
뭐 하는 거야 지금 한눈팔고 어? 너가 해야 할 거를 딱딱 해!
아니야, 지금 그림 그리는 시간 아니야. 이거 먹어 얼른 포도 다 먹어.
뭐 하는 거야 너만 이거 안 먹고 지금, 어? 친구 봐, 잘 먹지? 너만 안 먹고 뭐 하는데?
엄마 말 들어, 들으라고 준희야. 뭐라 그랬어, 엄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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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퍼붓는 말들이 어찌나 매운지
나는 등이 뜨거워지는 거 같았다.
양갈래 머리에 분홍색 세로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입은 준희라는 아이는
그런 엄마를 뒤로 하고 총총 뛰어 우리 테이블 바로 앞 수돗가로 가서
같이 온 친구와 함께 손을 씻기 시작했다.
둘 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친구가 준희에게 비누를 눌러 짜주었지만
준희는 손을 비비지 않고 물줄기만 빤히 보고 있었다.
준희라는 아이의 엄마는 같이 온 친구의 엄마에게
하소연하듯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 아니 그래서.. 제가 놀이 상담? 뭐 그런 거도 알아보고 그랬단 말이에요."
"비싸지 않아요? 그런 거 되게 비싸다고 하던데.."
"이번에 민생 그거 나온 걸로 할 수도 있다더라고요. 그런데 뭐 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아, 민생쿠폰으로도 된대요? 잘됐네."
"근데 쟤가.. 아 모르겠어요. 쟤 진짜 왜 저러지? 아니 아직 알파벳도 못써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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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틀어 준희 엄마라는 여자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태은이가 뱉어내는 포도씨와 껍질을 받아주는
남편의 손에 시선을 떨궜다.
테이블 위에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색연필이 가득 담긴 원통이 놓여있었다.
포도 여기서 다 못 먹으면
싸갈 수 있게 비닐백도 받았다.
옷소매가 젖도록 수돗가 물줄기에 팔을 적시고 있던 준희는
"그만 씻어! 거기 니 놀이터 아니야! 옷 다 젖잖아! 물 잠가! 잠그고 이리 와!"
하는 엄마의 불호령에
기린모양 수도꼭지를 눌러 내리고는
내 곁을 지나 엄마에게 걸어갔다.
나는 한동안
준희가 잠근 기린 수도꼭지에서
끝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걸 쳐다봤다.
#농장체험
#육아관찰
#씻을수있는것
#씻어낼수없는것
#나의아이
#남의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