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가 혈관을 타고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아

by FONDOF

2026년 2월, 49개월









"엄마,
내가 엄마 팔에 뽀뽀했으니까
이제 하트가 엄마 혈관을 타고
이렇게 엄마 뱃속으로 가서
엄마 배에 엄청 커다란 하트가 가득 찼어!
그래서 이제 엄마는
좋~은 기분이 되는 거야!"








게으르게 시작된 나의 아침은 언제나 바쁘다.

아이의 하얀 쌀밥 위에 바싹 덖아낸 멸치를 솔솔 뿌려줄 즈음

완벽하게 잠기가 가신다.

남편이 출근을 하는 월*수*금요일이면 아이는

"아빠랑 놀고 싶다, 나 아빠 보고 싶다."

한 번씩 아쉬운 마음을 살짝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늘 얼마나 즐거운 하루를 보낼 것인지

과장되게 일정을 브리핑해 준다.

"대신 오늘 뭐하는지 알아? 트니 친구들이랑 놀이공원에 갈 건데?"
"어? 놀이공원? 좋아! 엄마! 나 가슴이 두근두근해!"
"그래, 그러니까 얼른 밥 먹고 나갈 준비 하자! 이러다 늦겠어!"


호들갑을 떨어주면 아이는 신이 나서

멸치 얹은 쌀밥을 한가득 입 안에 욱여넣는다.





한 달 평균 나의 운전 거리는 약 1100km.

하루 평균 3~40km는 달리는 일상이다.

오늘은 트니 친구들과 일산 킨텍스 전시장에 설치된

실내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편도 약 45km,

오늘도 왕복 100km는 거뜬히 나오겠구나.


차를 타고 한두 시간 이동하는 건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다.

"우리 뭐 들으면서 갈까?"
"좋아! 페파피그 어때?"
"오 좋아, 엄마도 오랜만에 페파피그 듣고 싶었어."


치타부, 폴리, 타요 등 플레이리스트만 십 수개에

코코지 동화, 아빠가 녹음해 준 책, 블랙핑크 혹은 악동뮤지션 등

장르도 다양하다.

노래 듣는 게 지루해질 때면 끝말잇기를 하고

그마저 시시해지면 포켓몬 이름 대기, 폴리 등장인물 맞히기 등등

서로 주고받는 쫑알쫑알 수다가 끝이 없다.


나는 하루 중 아이와 차에서 보내는 이 시간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

창밖에 지금 지나간 파란 테슬라를 엄마도 봤는지 걱정하고,

저 할아버지는 어디 가시는 걸까? 궁금하다가

저 구급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많이 아픈 게 아니길 기도하고

버스 안에 탄 수염 난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고 꺅꺅 소리도 지르는 아이와 함께

페파피그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일산에 도착했다.






1시부터 저녁 6시까지

땀 뻘뻘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나오자

밖은 깜깜해져 있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신호 몇 번 걸리는 동안

아이는 야트막하게 코를 골며 단 잠에 빠졌다.

이제부터 약 한 시간 반 정도는 고요한,

오롯이 내 시간이다.

너무나 이 고요가 절실했다,


수도권 제1순환도로에 꽉 막힌 차들의 빨간 라이트를 멍하니 응시하며

브레이크만 밟았다 떼었다 간신히 움직이던 구간을 빠져나와

시속 60km, 엑셀을 지그시 눌러준다.

시속 80km, 그 많던 차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시속 95km, 앞 차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시속 110km, 뒤따라 오던 차가 보이지 않는다...


그르렁그르렁 아이의 코 고는 소리가 마음을 다독인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저녁 8시가 다 되었다.

지하철 역에서 남편을 픽업해서 셋이 함께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남편의 태은이 시계가 시작되고

나의 태은이 시계는 충전에 들어간다.

종일 입어 왠지 더 무거워진 듯한 외출복을 얼른 벗고

찰찰한 잠옷으로 갈아입자 온몸이 노곤노곤,

온수매트를 켜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맨발만 살짝 내놓고 누웠다.


편집 어플을 켜서 하이라이트 장면만 모아

1분 내외의 영상으로 만들고

페파피그 노래도 bgm으로 넣어주었다.

오늘의 즐거움을 가장 신선하게 보관하는

나의 습관 혹은 의식.


아이는 오늘 뽑은 장난감 경찰세트를 한껏 바닥에 늘어놓으며

아빠와 역할놀이를 한참 하고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가 긴 목욕을 했다.

남편이 로션 바르고 머리까지 말려줬으니 옷 정도는 입혀줘야겠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더 무거운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벌거벗은 채로 까불며 뛰어나온 아이의 탄탄한 두 다리가

삶은 문어같이 벌게졌다.


양가 할머니할아버지께 영상통화도 드렸으니

이제 방에 들어가서 책 두어 권 읽어주고 재울 차례.

갑작스러운 분리불안으로 나랑만 잤던 18개월 시기 빼고는

늘 밤잠은 아빠와 자는 루틴이기에

나는 이제 아이를 꼭 한 번 안아주고 모두 사랑해 노래를 불러주며

불을 끄고 퇴장하는 일만 남았다.





"엄마, 가지 마. 나 엄마랑 자고 싶피~"


뭔가 하고 싶은데 본인도 조금 염치가 없을 때

~하고 싶어, 가 아닌 ~하고 싶피 라고 얘기하는 버릇이 생겼다.

(예: "엄마, 나 초콜릿 하나 먹고싶피~")


유독 어제오늘 엄마와 자고 싶다고 엷은 때를 쓴다.

어제는

아니라고, 아빠랑 잠들고 나면 엄마 들어오겠다고

아이를 달래고 나왔지만

오늘은...

"그래! 엄마도 태은이랑 같이 잘게!"

라고 했다.


그게 뭐라고 얼굴이 그렇게까지 환해지는 걸까.

내가 아이에게 주는 게 아무리 작고 하찮아도

아이는 그걸 보석처럼 받아준다.


불 꺼진 까만 방 속,

어슴프레 아이의 실루엣이 내게 굴러와 폭 안긴다.

그리고는 내 팔을 하나 가져가더니

딱따구리처럼 쪽! 쪽! 쪽! 뽀뽀를 하고는

"엄마, 내가 엄마 팔에 뽀뽀했으니까
이제 하트가 엄마 혈관을 타고 이렇게 엄마 뱃속으로 가서
엄마 배에 엄청 커다란 하트가 가득 찼어!
그래서 이제 엄마는
좋~은 기분이 되는 거야!"

라고 했다.



어쩌면 마음을 헤아리는 건

부모가 아니라 아이다,

조건 없이 아주 단순하고도 직관적으로.

누구도 해주지 않고

누구도 해줄 수 없는 헤아림을

아이로부터 받는다.


나는 아주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쉬고

후우우... 길게 내뱉었다.






"고마워, 태은아.

엄마는 태은이가 엄마 아들이라서 정말 감사해."


"엄마, 나도 엄마 사랑해."


"응,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해."


"엄마 그런데.. (울먹)

내가 만약 멀리 가게 되면?"


"응? 태은이가 어딜 가?"


"아니면 엄마가 멀리 가서 나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우리 다시 못 만나면? (울먹울먹)"


"아아 엄마 아빠가 태은이 잃어버려서 못 만날까 봐 무서워?"


"응, 나 그게 걱정이 돼.

나 그런 생각이 들은 거야.

그러면 나 너무 슬퍼.."


"태은아, 그럴 일은 없어.

엄마아빠는 절대로 태은이를 잃어버리지 않아."


"그래?"


"그럼! 왠 줄 알아?"


"왠데?"


"엄마는 태은이랑,

태은이는 아빠랑,

또 아빠는 엄마랑.

이렇게 우리 세 가족은 서로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거든."


"어, 스파이더맨 거미줄처럼?"


"맞았어! 바로 그거야.

그래서 오늘도 아빠는 출근하고 우리는 멀리 일산까지 다녀왔지만

결국 어떻게 됐어?"


"다시 만났어!"


"그래! 우리는 늘 그렇게 다시 만나는 거야.

절대로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아."


"스파이더맨 거미줄 때문에?"


"맞아, 아주 투명하지만 아주아주 튼튼해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거든."


"어 근데 엄마!

나 궁금한 게 있어!"


"그래? 뭔데?"


"나는 왜 스파이더맨처럼 손에 구멍이 없어서 거미줄 발사를 못해?"








"그건.. 이제 그만 자자.."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