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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pr 14. 2024

논문 주제는 게임입니다



벌써 4월 중순이 되어 간다. 춥다. 정확히는 다시 추워졌다. 함부르크 날씨가 변덕스럽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일인가 싶게 춥다. 그래도 휑하던 캠퍼스는 사람 냄새가 나며 북적북적 따뜻해졌다. 봄을 알리는 화사한 노을도 보았다. 새 학기의 둘째 주다. 



화요일의 노을 © 2024 noi




이번 주는 정말 학생으로서 바쁜 한 주였다. 지난 학기도 바쁘고, 과제도 많았지만, 이번 학기가 유난히 새롭게 느껴지는 건 아마 논문 때문인 것 같다. 이번 주는 3일 연속 논문을 위한 콜로키움 수업이 있었다. 각자 자기 논문에 대한 계획을 짧게 발표하고 자유롭게 토론하거나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번 학기가 아닌 다음 학기에 쓸 예정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수업을 들어야 했다. 원래 논문은 여름 학기에 쓰기 때문에 논문 관련 수업은 여름 학기에만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에 있었던 인턴십 발표에서는 두 번째 학사를 하는 업무 경력이 있는 유학생으로서 득을 봤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논문은 한국어로도 써본 적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졸업했던 학과는 논문이 아닌 졸업 시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써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찌어찌 독일어로 수업을 듣고 있지만 쓰기는 또 다른 레벨이다. 그것도 논문이라면 더더욱. 문법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학술적 글쓰기에서는 이것저것 지켜야 하는 규칙이 영어보다 더 많다. 


몇 년을 공부하고도 어찌 독일어로 쓰기도 못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로 변명을 해보자면 진짜 언어천재가 아닌 이상 나중에 배운 외국어일수록 습득이 느린 게 정상이라고 했다. 나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독일어 순서로 편안하게 느낀다. 이미 외국어 두 개가 먼저 들어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독일어가 느린 것은 당연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논문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콜로키움은 지도 교수에 따라 진행되는 날짜나 스타일이 다르다고 했다. 내 경우, 아주 이른 학기 초부터 2시간씩 4일 동안 다 같이 모여서 했다. 첫날에는 가볍게 자기소개와 함께 자신의 논문 주제를 소개하고, 논문이나 구술시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졸업 논문 방식이라고 해서 논문만 내면 끝이 아니라 그 논문에 대해서 구술시험을 본다고 했다. 



과 친구들의 뒷모습 © 2024 noi




내 지도 교수님 콜로키움 수업에는 나를 포함해서 약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번 학기에 논문을 쓰는 학생 반, 다음 학기에 쓰는 학생이 반이었다. 짧은 자기소개와 논문 주제를 들었다. 우리 과의 특징은 도시 문화에 관련된 건 내가 잘 연결시킬 수만 있다면 정말 거의 무엇이든 논문 주제로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 도시 인프라, 정체성, 축구 팬 문화, 도시 안전, 디지털 툴 등 논문 주제도 정말 다양했다. 나는 이스포츠가 도시 문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쓰기로 정했다. 


지금 내 두 번째 학사 전공은 도시문화학. 처음에는 첫 번째 학사로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 게임 회사를 다니다 퇴사한 내 이력을 보았을 때 관련성이 없는 상당히 생뚱맞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저 이게 재밌어 보였다. 그리고 막상 해보니 힘들긴 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과는 꽤 다르다는 생각에 고민도 많았다. '게임 회사 PM'이라는 경력과 '도시문화학'이라는 새 학사 사이의 간극이 스스로도 오랫동안 생소했다. 당시에는 직업을 바꾸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고는 하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첫 번째 학사와 업무 경력이 전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논문 주제를 정할 때가 되니 그 사이에 숨어있던 다리가 보였다. 여러 가지 주제 중에서 고민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반복하다 보니 그동안 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다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하나의 다리가 아니었다. 그동안 도시문화학에서 배운 지식들을 이스포츠에 적용하여 살펴볼 수 있는 영역이 너무 많아서 추리는 데 고민이 될 정도였다. 여기에 대한 내용은 좀 더 정리가 되는대로 적어보고, 오늘은 논문 주제를 결정하면서 들었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처음부터 이스포츠에 대해 적겠다고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처음엔 방향성을 잡기 힘들었고, 그 다음에는 찬찬히 유학 생활 동안 내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에 대해 돌아보았다. 그렇게 세 가지 주제를 추렸다. 이스포츠 외에도 유학생으로서 바라보는 문화적 다양성과 정체성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서도 고민했었다. 이 세 가지 주제는 관련성이 없는 전혀 다른 주제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주제'라는 것이다. 다소 마이너 하달까? 유학생, 동물, 이스포츠 모두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주목받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사회는 유학생보다는 이민자, 동물보다는 사람, 이스포츠보다는 소셜 미디어에 더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스포츠를 선택한 건 개인적인 이유가 컸다. 


게임은 그동안 내 인생에서 애증의 대상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으면서도 부정적인 사회의 인식에 눈치 보느라 더 마음껏 좋아하고 티 낼 수 없었던 나의 오랜 취미.


그래도 운 좋게 내가 게임 회사에 들어간 후부터 업계가 많이 성장해서 부모님의 부정적인 인식도 많이 바뀌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덕업일치라고도 생각했지만, 그 일로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는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 아이러니한 건 게임 회사를 다닐 때는 바빠서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할 시간이 없었고 (혹은 그럴 에너지가 없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좋아하는 게임을 실컷 하던 날이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놀아버렸다는 자괴감에 괴롭기도 했었다(사실 원인은 게임이 아니었지만). 먼 타국에 와서 유학생으로서 게임을 하면 그 자괴감은 두 배, 세 배였다. 너무 바쁜 한국 사회가 맞지 않아 나왔는데, 뼛속까지 한국인인 내 속에는 타향살이에서는 어쩐지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감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사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쉬어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내 라이프 스타일에 있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외식 한 번 하는 것도 생각이 많아지는 소심한 늦깎이 유학생인 내게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이 때로는 게임 때로는 드라마 때로는 유튜브였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게임이라는 취미가 있었기에 외로운 이 유학 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모두 떠나 게임이 내게 가져다준 것과 내게서 앗아간 것을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해 보았다. 적어도 내게는 게임이 가져다준 것이 더 많았다. 적어도 내게는, 살면서 내가 힘들었던 순간 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게임 덕이 컸다. 게다가 사회적 인식도 어디까지나 '남의 시선'일뿐.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적게 신경 쓰는 삶을 살려고 노력 중인 지금, 오히려 '이스포츠'를 내 논문 주제로 선택함으로써 내 무의식 깊이 자리 잡은 사회적 인식을 부수고 싶은 마음이랄까.


논문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한 가지 분명한 건 게임 회사를 다닐 때보다, 게임을 주제로 도시문화학 논문을 준비하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일단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닐까.












*커버 이미지 출처: UnsplashKrzysztof Maksimi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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