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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pr 28. 2024

지하철이 안온다고? 갑자기?

어느 금요일 저녁, 어느 독일 지하철역의 대혼란


금요일 저녁, 투잡 중 하나인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길이었다. 평소처럼 같은 지하철역, 같은 플랫폼으로 내려갔는데 그날따라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원래도 사람이 많은 역이지만 어쩐히 유난히 더 붐비는 사람들.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언제쯤 지하철이 올까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전광판에는 내가 타야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의 지하철 이정표가 떠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늘 타던 곳으로 왔는데...?'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확인해 봐도 내가 플랫폼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니었다. 전광판을 계속 보고 있자니 공지가 하나 눈에 띄었다. 지금 중앙역에서 인명 구조 작업을 하고 있어서 중앙역으로 가는 S반(독일 지하철의 한 종류. S반, U반 두 종류가 있다) 지하철 운행이 급중지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국과는 좀 다르게 독일은 지하철의 연착이나 갑작스러운 서비스 중지가 좀 더 자주 일어나는 곳이긴 하지만, 그 이유가 인명 구조인 경우는 또 그렇게 잦지는 않다. 보통은 대부분 기술적인 이슈가 원인이었는데 오늘처럼 소방대 구조 작업으로 인한 중지는 처음 보았다. 중앙역에 큰 일이 난 건 아닌지 걱정이 되면서도(나중에 기사를 검색해 보니 공사하던 곳에서 충돌 사고가 있어 부상자가 여럿 있었다고 했다), 지금 내 눈앞에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 개인적으로는 그야말로 큰일이 난 - 사람들 수백명이 대혼돈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구글맵을 켜고 다른 루트를 파악했다. 이런 긴급 상황은 구글맵에도 바로바로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S반도 홈페이지를 통해 현재 상황을 고지하는 게 전부다. 긴급 상황이니 대체 운행편 같은 게 있을리 없다. 다행히 집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버스는 빙빙 돌고 돌아 가는 루트라 아주 오래 걸린다. 예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탔다가 멀미가 나서 중간에 내렸던 기억이 났다. 일단은 패스다.



당시 버스 정류장 모습 (c) 2024 noi



가장 현실적인 대책은 다른 버스를 탄 후 가까운 U반 역에 내려서 환승하는 루트인 것 같았다. 곧바로 버스를 타기 위해 지상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를 타려면 좀 기다려야 했다. 이쪽저쪽 오가는 인파 속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메고 있던 백팩을 벗어서 한 손에 쥐었다. 혹시 모를 소매치기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거기서 그렇게 하는 건 나밖에 없는 듯 보였고, 독일은 소매치기가 다른 유럽 나라보다 적다고는 하나 한 번 당한 뒤로는 경계심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버스를 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빈 버스도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 번에 타기도 어려워 보이는데다, 어찌저찌 탄다고 한들 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20분, 30분을 서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갑갑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이번주 부쩍 추웠던 날씨에 패딩을 입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하필 또 이 때는 날이 갑자기 풀려서, 이대로 버스에 타면 다들 너무 따뜻하게 입은 탓에 서로서로 체온이 올라 쪄죽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다른 방법은 없을지 다시 한번 구글맵을 들여다 보다 문득 걸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까지 걸어가는 건 구글 맵 상으로는 1시간 51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짧은 다리로 가는 내 걸음이라면 적어도 2시간 이상 걸린다는 이야기이다. 일을 하면서 계속 서있었던 탓에 다리가 이미 좀 지쳐있었던 탓에 망설여졌다. 그런데 루트를 보니 가는 길에 이케아를 지나가야 했다.



사고 싶었던 이케아 고무 장갑 (c) 2024 noi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케아에 가서
 고무장갑이나 살까?


일단은 1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이케아까지 먼저 가보기로 했다. 몇달 전부터 이케아에서 파는 고무장갑을 사고 싶었는데 일이 끝나면 늘 지쳐서 집에 돌아가기 바빠서 가보지를 못했었다. 어쩌면 쇼핑을 마치고 나면 상황이 해결되어 지하철 운행이 재개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참에 고무장갑이나 사자 생각하며 마음을 돌렸다.



위기(?)를 기회로! 오히려 좋아!



조금 신기했다. 예전엔 이런 상황이 오면 짜증이 나거나 기분이 안좋아졌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짜증낼 핑계가 없지도 않았다. 이번 달에는 알토나에서 일을 하는 날이 딱 그 날 하루였고, 하필 내가 출근한 날 이 대혼란 사태가 터졌다. 재수가 없다고 불평을 쏟아낼만도 했다. 그런데 딱히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버스에 집착하지 않고 돌아서는 내 결정도 낯설면서도 기분 좋았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다. 이 혼란한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을 뒤로 하고 걷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마치 치열하게 경쟁하던 회사 생활을 등지고 나와 걷던 그 날이 생각나는 듯도 했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도 기분 좋게 부드러웠다.




분명 다른 물건에 혹하겠지만...
쇼핑에 정신 팔려서 너무 많이 걸으면 안돼.
너무 많이 사서도 안 돼.
내 1순위 목표는 고무장갑!




이케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다짐했다. 향초 하나 사러 갈까 하고 들렀다가 서랍장을 사고 나온다는 해외밈이 있을 정도로 이케아도 쇼핑의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운 곳 중 하나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것 저것 다른 물건들에 눈이 가고 손이 갔다. 당장의 지갑 사정을 생각하며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그래도 다음에 다시 구매를 고려해보고 싶은 것들은 사진을 찍어두었다.




부엌 보조 조리대로 쓰고 싶은 이동식 탁자 (c) 2024 noi



한차례 이케아 쇼핑을 마치고 S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S반 지하철이 다시 다니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냥 계속 걸어보기로 했다. 대신 집까지는 무리니까 가까운 U반이 다니는 지하철역까지만 걸어가기로 정했다. 도보 20-30분. 나쁘지 않다.


이케아 쇼핑으로 약간은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처음 가보는 길을 걸었다. 늘 지하철만 타고 다녔으니 걸어서 가는 이 길의 모든 풍경이 새로웠다. 날씨가 좋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늘에 감사 표시도 했다. 행여 비라도 왔으면 걸을 생각은 못했을 거다.



하얀 튤립이 가득한 꽃밭, 새로워 짜릿해 (c) 2024 noi




이 건물 저 건물, 이 가게 저 가게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하얀 튤립이 가득 피어있는 꽃밭이 나왔다. 하얀 튤립을 종종 보긴 했어도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건 처음 봤다. 정말 고왔다.


밝을 때 걸어본 적 없던 리퍼반 뒷길도 처음으로 걸었다. 리퍼반은 술집, 클럽, 유흥업소가 한데 모인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유흥의 거리인데, 보통 메인 스트리트로만 다니기 때문에 뒷길로 올 일이 잘 없다. 밤에는 어쩐지 으슥하기도 하고.



금요일 저녁 7시 40분. 해가 길어져서 밝다. (c) 2024 noi



그런데 밤에는 으슥하게만 느껴졌던 리퍼반 뒷길은 대낮에는 평범했다. 공간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거리 하나 차이인데 이렇게 풍경이 다르다. 어떤 가게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검색해보니 무려 1968년부터 56년 동안 리퍼반의 터줏대감 중 하나로 공연을 이어온 뮤직 클럽이었다. 금요일 저녁 공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몇 년 전까지는 클럽이나 공연도 친구들과 곧잘 가고는 했지만, 밤늦게 놀고 난 이후의 피곤함이 싫어서 가지 않은 뒤로는 안간지 오래 되었다. 그래도 가끔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공연장을 찾곤 하는데, 막상 가면 또 재밌다. 저기도 다음에 한 번 가보고자 마음 먹었다.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한 것 치고는 재밌는 구경을 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만원버스가 아닌 걷기를 선택한 나의 결심이 있었다. 만약 수많은 인파와 불편함을 견디며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면 조금 더 빨리 도착했을지는 몰라도 마음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훨씬 지쳤을 것 같다. ‘평소와는 다른 선택’ 덕분에 만원 버스 대신 하얀 튤립 꽃밭을, 그리고 새로운 공연장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삶에 ‘새로움’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리 해외에 살아도 한국에서 집순이는 독일에서도 집순이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늘 가는 곳만 다니기 때문이다. 어느 새 익숙함이 편해졌다. 익숙해졌다는게 지루하다는 건 결코 아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것을. 좋은 점은 이제 이 생활에 적응해서 안정을 찾았다는 것이고, 아쉬운 점은 새로운 경험이 예전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외 생활 초반의 첫 1년이 나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의 그 곳의 나는 살면서 딱 한 번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곳의 나도 살면서 딱 한 번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때가 종종 그립다. 모든 게 신기하고 반짝반짝 빛났던 그 때가. 그 그리움만큼 지금을 소중히 하려 한다. 7년 뒤의 내가 유학생이었던 이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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