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May 12. 2024

4개 국어를 쓰는 하루하루

혹은 0개 국어가 되어가는 하루하루


이번 학기는 수업이 뜨문뜨문 있다. 이번주 수요일은 오랜만에 논문 연구 방법과 관련된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여유있게 학교에 도착해 수업에 들어가기 전 학교 카페에 들렀다. 앞에 줄 선 사람은 별로 없는데 어쩐지 평소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싶더니 다들 하나같이 아이스 라떼를 시키고 있었다. 여름이 오고 있다는 의미다. 겨울이 길고 흐린 함부르크에서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들은 나를 더 설레게 한다. 늘 마시던 라떼를 시키려던 나도 아이스 라떼로 마음이 바뀌었다. (특이한 건, 아이스 라떼랑 카푸치노는 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메뉴에 없다.)


짧지만 오래 걸리는 아이스 라떼 줄을 기다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한 학기 아래의 학교 동기 A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포옹 인사를 나누며 근황을 묻고 같이 아이스 라떼 한 잔씩을 들고 강의실로 올라가며 스몰 토크를 나눴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우리 계속 독일어로 말하고 있는 거 알아? 맨날 너랑 영어로만 이야기하다가 독일어로 이야기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ㅋㅋ”


그러고보니 그랬다. 이 친구와는 늘 영어로 이야기를 했었다. 친구는 독일 사람이라 독일어가 모국어지만, 내가 독일어가 불편하던 시기에 알게 된 친구라 영어만 썼었더랬다. 오늘은 나도 모르게 독일어가 튀어 나왔다. ’드디어 독일어 레벨업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면서도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요즘은 독일어랑 영어가 마구 섞이는 일이 잦다. 이게 바로 0개 국어가 되는 과정인 걸까?



일요일 아침 풍경 (c) 2024 noi




요즘 들어 유난히 독일어 문장을 말하면서 영어 단어가 섞이거나 반대로 영어 문장을 말하면서 독일어가 섞이는 일이 잦다. 종종 한국어 단어가 생각이 안나 오래 고민하기도 하고, 일본어도 ‘당근’ 같은 쉬운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이틀씩 애태운 적도 있다. ‘이렇게 쉬운 단어를 잊어버리다니 말도 안된다’고 자존심에 굳이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내려고 버티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는 일본인 동료가 우연히 그 단어를 말하면서 알아버린 적도 있었다.


최근 들어 알바를 하기 시작하면서 일상에서 한국어, 일본어, 영어, 독일어를 모두 사용하고 있는데 아마 그래서 일까. 학교에서는 주로 독일어를 쓰고 가끔 영어를 쓰고, 일하는 곳에서는 독일어와 일본어를 주로 쓰다가 가끔 영어를 쓴다. 평소 메세지를 주고 받는 친구, 지인들과는 한국어, 영어, 독일어를 많이 쓰고 가끔 일본어를 쓴다.


대신 유튜브처럼 무언가를 볼 때는 한국어의 비중이 꽤 높다. 그 다음이 일본어, 영어, 독일어 순이다. 독일어를 더 늘리려면 독일어만 보고 들어야겠지만, 아직도 독일어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재미있는’ 콘텐츠를 찾지 못했다. (유익한 건 많다.) 일본어는 일드가, 영어는 미드가 큰 도움이 되었는데 독일어는 그런 면에서 참 어렵다. 그래서 미드를 독일어 더빙으로 보는 게 더 나을 지경이다. 해리포터 독일어 더빙이나 셜록 홈즈 독일어 더빙처럼 평소 좋아했던 작품을 가끔 독일어로 보지만, 요즘은 디지털 디톡스를 하려고 넷플릭스도, 아마존 프라임도, 심지어 집 인터넷도 다 취소를 해버려서 얼마 전에 산 무인양품 씨디 플레이어로 독일 라디오만 종종 듣고 있다.



우연히 비보이/비걸이 모여 연습하는 장면을 봤다. 지금도 이런 걸 보면 설렌다. (c) 2024 noi





이렇게 일상 언어가 4개가 되고 나니 예전보다 언어간 스위치가 잘 안된다. 언어를 갑자기 전환해야 할 때의 로딩 속도도 전보다 더 오래 걸려서 상대가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어쩔 때는 일하는 곳에서 손님과 계산을 하다가도 ’영어로 잘 계산을 해놓고는‘, ’물건을 쇼핑백에 담으면서‘ 어떤 언어를 썼는지 금새 까먹고 마지막 인사는 습관처럼 ‘독일어로 말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물론 그 중에 아직도 독일어가 가장 어렵다. 수업은 수업대로 학술 용어가 많이 쓰이니 어렵고, 사적인 자리는 사적인 자리대로 은어가 많아서 어렵다. 얼마 전에는 이번 학기에 논문을 쓰는 친구들에게 나도 껴달라고 해서 왓츠앱 단톡방에 들어갔는데 엄청나게 줄여쓰거나 은어를 썼다. 진짜 간단한 문장인데 이해를 못하겠어서 충격 받았었다. 아마 한국어 공부하던 외국인들이 10대나 20대가 쓰는 채팅용어를 보면 이런 기분이겠지?


지금까지 들어가본 단톡방은 학교 동기 전체 단톡방 정도고, 거기서는 사담을 많이 나누지 않기 때문에 크게 못느꼈는데 친한 친구들끼리 있는 소그룹 단톡방에 들어오니 사용하는 어투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언어를 배우고 습득하다보면 여러 번의 전환기가 오게 되는데 4번째 언어를 배우면서 겪는 이 경험들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독일어라는 언어 때문인지, 아니면 이게 네번째 언어라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어렵고 벽이 느껴지는 순간은 있지만, 느리게 갈 지언정 이 배움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 영어도 더 잘하고 싶고, 일본어도 더 잘하고 싶고, 독일어도 조금만 더 잘했으면 좋겠고, 독일어가 조금 더 잘해지면 다른 언어도 또 배우고 싶다. 하지만 그냥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다가서기엔 언어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끝이 없다. 단순히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잘하고 싶은지 아니면 그 목표를 위해 뭘 하고 싶은지 정해야 한다.



개 산책 시키다 개똥인 줄 알고 실수로 주운 민달팽이… 사과하며 다시 보내줬다 (c) 2024 noi




그래서 요즘 꽃보다 남자 일본 버전을 다시 보기도 하고, 프렌즈를 다시 보기도 한다. 꽃남은 지금 다시 보면 참 유치하면서도 여전히 설레고 재밌다. 프렌즈는 영어 공부하면서 볼 때는 별로 재밌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빵빵 터졌다. 독일어는 독일 뉴스 어플을 다운 받았다. 웹브라우저로 보면 쉽게 드래그해서 번역해서 보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기 때문에 읽기 공부가 안되는데, 앱에서는 드래그를 막아놔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직접 단어를 찾아서 뜻을 알고 해석을 해야만 한다. 어제 본 뉴스에서는 아시아 말벌 개체수가 독일에서 점점 늘고 있으니 조심하고 벌집을 발견하면 신고하라는 뉴스였다.


그리고 지금 일하는 곳에서 독일어로 손님들 상담을 도와주는 게 조금 더 편해지면 코딩을 배우고 싶다. 컴퓨터 언어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지만 몇 번인가 시도하다가 멈춰버렸다. 인간의 언어처럼 문화도 없고, 그 언어를 배우러 비행기 타고 날아갈 나라도 없고, 코딩 드라마도 없다. 내가 언어를 배워온 방식과 코딩 언어를 배우는 방식은 너무도 달라서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2008년 칠월 칠석 일본 호텔 라운지에서 일하다 말고 매니저가 건네 준 종이에 장난 삼아 적었던 내 소원.




7개 국어를 하게 해주세요




어쩌면 죽기 전에 이루고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 08화 알바에게 3주 휴가를 주는 나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