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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y 19. 2024

배려는 배려를 낳는다


독일 대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고 들었고, 내 동기들도 그러했기에 그동안 늘 영어로 발표하고 과제를 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영어를 편히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있었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교양 수업 시간에서도 학기말 과제로 발표를 했었다. 교양 수업은 우리 학과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 학생들도 섞여서 수업을 듣는다. 심지어 우리 과 학생들의 수는 타과에 비해 상당히 적은 편이라, 대부분의 교양 수업의 80-90%는 타과생이라고 보면 된다.


이 때 들었던 수업에서는 문화가 의복에 끼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국 조선 시대 의복과 현대의 패션 스타일을 비교하는 짧은 영상을 과제로 만들었었다. 우리과 동기들 중에도 영어를 불편해 하는 친구들은 있기 때문에, 그런 학생들을 배려해서 영어 자막도 넣고 최대한 쉬운 영어 표현을 쓰며 영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발표 후 토론 시간에 놀라울 만큼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교수님과 나의 일대일 토론이 되었다. 성적은 잘 나왔지만, 나의 발표 시간에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 다른 학생들이 제법 신경쓰였었다. 당시 교수님은 내가 한국을 소재로 발표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라 참여를 못한 것 같다는 피드백을 주셨지만, 내가 보기에는 학생들이 영상 내용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은 관심이 없거나. 하지만 이미 끝난 일. 그리고 그 학생들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비슷한 상황에서 발표할 일이 생겼다.


이번 학기에 들은 교양 수업의 과목명은 '새로운 디지털 경제'로, 경제 선두주자가 된 아마존, 넷플릭스, 에어비앤비, 틱톡 등의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글을 읽고 조사하여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하고 발표의 끝에는 2-3개 정도의 토론 주제를 가지고 와 서로 토론하는 수업이다. 여전히 내 독일어 실력으로는 현지인들의 발표와 토론을 원활하게 알아듣고 나도 유창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감사하게도 강사님께서 영어로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셨다. (돌아보면 어떤 교수님이나 강사도 독일어를 강요한 적은 없다, 참 감사한 일.) 하지만 지난 학기처럼 나와 강사님만 10분 토론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지 염려가 되었다. 그렇다고 한 명 한 명 찾아가 '너 영어 잘하니?' 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무엇보다 워낙 학생들이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수업이었기에 내 발표만 토론 없이 침묵으로 또는 1대1 토론으로 흘러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독일어로 스크립트를 만들어서 보고 읽기라도 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한국어로 발표할 때도 스크립트를 짜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스크립트를 짜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도무지 써지지 않았다. 발표는 영어로 하되 슬라이드는 독일어로 만드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슬라이드를 보면서 발표를 해야 하는데 내가 내 슬라이드가 무슨 내용인지 바로바로 인지를 못해서 자꾸 벙찔 것 같았다. 그렇게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흘러갔고, '에라 모르겠다 케세라세라' 마인드가 점점 굳혀져 갈 즈음, 같은 과 독일인 동기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슬라이드와 발표는 영어로 하되 핸드 아웃은 독일어로 번역해서 나눠주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핸드 아웃은 여러 페이지의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짧게 한 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한 요약본으로 핸드 아웃 제출도 이번 프레젠테이션 발표 조건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발표를 할 때 핸드 아웃을 준비해 본 적이 없어서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부분!


친구의 조언대로 프레젠테이션과 발표는 영어로 준비하고, 핸드아웃만 따로 독일어로 만들어서 준비해 갔고, 이 기발한 아이디어 덕분에 나는 발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행히 다른 학생들이 토론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사람은 영어로, 어떤 사람은 독일어로 이야기 하고, 내가 알아들은 내용은 답하고 못알아들은 건 다시 물어보며 자연스러운 토론 시간을 이어나갔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의 이야기. 이번 주는 다른 학생들이 다시 독일어로 발표를 하는 차례였다. 평소처럼 강의실에서 자리를 잡고 혼자 앉아 (친구 없음 주의) 첫번째 발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학생도 모두가 그랬듯 핸드 아웃을 준비해 왔고, 모두에게 한장씩 나눠줬는데 핸드아웃이 영어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프레젠테이션 타이틀은 독일어고 독일인 학생인데 이상하다 싶어 다른 학생들이 받은 핸드아웃을 봤더니 거기는 독일어로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학생은 지난 내 발표를 통해 내 독일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를 위해 일부러 내 핸드아웃만 영어로 준비해준 것이다. 본인 발표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을 텐데, 이런 배려라니! 정말 학교와서 타인에게 받은 배려 중 가장 감동이었다.


역시 배려는 또 다른 배려를 낳는다. 자꾸 팍팍해지지 말고, 타인을 배려하는 삶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겠다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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