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당일치기 여행
요즘 아침마다 가장 중요하게 하는 일은 오늘 할 일의 우선순위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전날 밤에 확인하고 자도 자고 일어나면 다시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다시 체크리스트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에게 리마인드를 시켜줘야 한다.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만 흘러가겠냐마는, 그래도 요즘은 제법 잘 지키며 살고 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가는 날이 없다. 평일도 주말도 늘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글을 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투잡에 유학 공부 병행은 아직 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버겁다. 아직은.
그래서 저녁마다 고민한다.
할 일을 더 할까, 아니면 할 일을 잊고 쉴까.
무리하다 아파본 적이 여러 번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래도 매일 저녁 뭐 하나라도 더 해치울 일이 없나 생각은 계속해서 불쑥불쑥 떠오른다. 쉬어도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자꾸 뭔가를 더 해야 할 것 같다.
시험 기간이 되면 학교나 일터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만나지는 것 외에는 사람들을 만나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자칫 느슨해지다가 아예 놔버리는 게 무서워서 매일 내가 긴장의 끈을 잘 쥐고 있는지 확인한다.
하지만...
'나는 왜 늘 이렇게 심각한 걸까?
왜 이렇게 진지하기만 한 걸까?
일이 많아도 밝고 재밌게 일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열심히 하고 있는 내가 대견하지만, 조금은 가벼워질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조금씩 안 하던 걸 해보자 싶었고, 그래서 이번엔 과감하게 시험 기간 중 여행을 떠나봤다.
베를린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함부르크는 이미 내게 너무 익숙하다. 내게 필요한 건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기분이 묘했다. 서울이 익숙할 때는 함부르크가 내게 탈출구였는데 이제 함부르크가 익숙해진 나는 함부르크가 아닌 새로운 곳의 일탈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무지 베를린 지점 방문. 그 외에는 딱히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곳에 가서 끌리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내게는 무인양품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무지는 독일에 제법 여러 지점을 가지고 있다. 북독일에는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지점이 있다. 함부르크 지점이 아담한 매력이 있다면 베를린 쿠담에 있는 매장은 독일에서 제일 크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기차는 플릭스트레인을 탔다. 플릭스트레인은 가성비 좋은 기차로 가장 대중화된 도이체반(DB) 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플릭스트레인이 처음 도입되던 시기에 표를 잘못 사서 비싸게 돈을 낸 적이 있어서 한참을 이용을 안 하다가 이번에 타봤다. 갈 때는 잘 갔는데, 올 때는 고생을 좀 했다. 이 이야기는 시간이 될 때 따로 기록해 보겠다.
오전 10시경. 베를린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구글 맵에 주소를 찍고 곧바로 무지로 향했다. 파란 선을 따라 더듬더듬 걷다 보니 어쩐지 낯이 익은 풍경이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 친구를 만나러 왔을 때 와봤던 곳이었다. 그때는 백화점에 있는 문구점을 구경하러 왔었다. 추웠고, 눈이 내렸던 그날과 다르게 오늘은 밝고 따뜻한 날이라는 점이 달랐다. 난 원체 지리에 약하고 미리 계획을 세우며 조사한 것도 아니라서 이번에 완전히 새로운 곳을 가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익숙한 곳에 다다랐다. 그래도 좋았다. 아니 익숙해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무지는 전혀 새로웠다. 단층으로 보이는 건물 외부 모습과 달리 내부는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마음에 쏙 드는 옷들이 세일 중이었다. 이 가격과 이 착용감. 구매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내 지갑은 조금 더 힘들어지겠지만, 최근 정말 일이나 공부만 한 나를 위해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다. 최근 구매를 고민 중이던 게스트 매트리스도 실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다다미 제품들이 엄청 많아서 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함부르크가 별로 더운 날이 없기에 망정이지 내가 스페인 살았으면 당장 샀을 것 같은 제품들이 가득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닐 일정을 앞두고 쇼핑을 미리 한 건, 그것도 무거운 옷을 산 건 치명적인 실수였지만. 그래도 기꺼이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계속 걸었다. 마침 동료에게 추천받은 화장품 브랜드 매장도 그 근처라 아이라이너도 샀다. 무지에서 생각보다 돈을 많이 써서 다른 건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고 아이라이너만 집었다. 그런데 손등에 묻은 아이라인 테스트한 흑적을 지우는데 메이크업 리무버가 너무 좋아서 메이크업 리무버도 사버렸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팠다. 구글 맵을 열어 그동안 저장해 둔 장소를 대충 훑어보다가 눈에 띈 식당으로 향했다. 라멘집이었다. 누군가가 추천해 줬거나 인스타그램에서 봤거나 아니면 지나가다 저장해 둔 집인 것이 분명했다. 지하철을 타고 20-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이번 학기부터 학생증의 교통 티켓이 독일 전역의 대중교통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티켓으로 업그레이드되어 대중교통을 타는데 부담이 없어 좋았다. 그렇게 식당을 가는 동안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 갔던 카페인데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 또 갈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카페 이름이 생각이 안 나고 구글 맵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서 반쯤 포기하고 라멘집에 다 와 갈 때쯤이었다.
‘어라? 이 카페가 왜 여기 있지?’
이름이 생각 안 나던 그 카페가 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있었다. 친근한 카페 모습도 메뉴도 내가 알던 그 카페가 맞았다. 알고 보니 내가 가려던 라멘집 바로 옆이 그 카페였다. 아마도 지난번에 이 카페를 나와서 길을 걷다가 발견한 라멘집이 맛있어 보여서 저장을 해놨었나 보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구글 맵에 저장을 해두고 일단은 가려던 라멘집으로 향했다. 오후 2시 45분경. 사람은 많이 빠진 시간이었지만 야외석은 만석이었고 나는 식당 안쪽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혼자 왔을 때는 역시 구석 자리가 마음이 편하다. 라멘집에 가면 늘 먹는 돈코츠 라멘을 주문했다. 여름 메뉴가 잠깐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역시 나는 음식은 늘 먹던 게 좋다. 음료는 레모네이드가 없어서 복숭아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그동안 함부르크에서는 한국에서 먹던 복숭아 아이스티 맛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여기는 딱 내가 기억하는 그 복숭아 아이스티 맛이었다. 라멘도 너무 맛있어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웠다.
라멘을 맛있게 먹고, 얼마 안 되지만 팁도 드린 뒤에 근처에 있는 문구점에 들러 퍼퓸 페이퍼랑 수첩을 샀다. 처음 왔을 때는 귀여운 엽서를 샀었다. 두번째 가는 데도 하나하나 귀엽고 감성 넘치는 제품들이 가득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카페, 식당, 문구점이 다 모여있는 거리를 하나 가지게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몽골몽골 가슴에 번졌다.
이제는 아까부터 머리에 맴돌던 카페에 갈지 아니면 한국분이 운영한다는 한국 빵집에 갈지가 고민이었다. 잠깐 문구점 앞의 벤치에 앉아서 거리랑 시간을 계산해 보니 생각보다 빠듯했다.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이내 마음이 촉박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어느 카페도 가기 싫어졌다. 바쁜 일상에서 여유를 찾고 싶어서 계획도 안 짜고 온 여행인데 어느 순간 빠듯해진 일정에 조급해진 마음이 눈에 보였다.
카페는 뒤로 접어두고 내 마음의 여유를 위해서 뭘 하고 싶은지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 나 이번 여행에서는 여행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지!’
이번 여행에서야 말로 그림을 그리는 여행을 해보겠다며 집에서 노트랑 펜까지 챙겨 왔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난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고 잘 그리지도 못하지만, 여행 중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을 글로 옮기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들을 그림으로 옮기는 게 여행 중에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하지만 사실 그림을 그릴 정도의 여유가 생기는 여행이라는 게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릴 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소셜 미디어를 하는데 보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의 나는 디지털 단절을 실천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하니 편하게 앉아서 끄적일 수 있는 공원에 가고 싶어졌다. 구글 맵에서 공원을 검색하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베를린 돔이었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돔으로 걸었다. 이 길도 내게 익숙했다. 베를린 돔도 친구랑 갔던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때 같이 가서 먹었던 아이스크림 집에도 가고, 그때는 문을 닫아서 들어가 보지 못했던 무지 Hackescher Markt 지점도 가봤다. 찹쌀떡 아이스크림을 5개씩 담아놓은 아이스크림통이 눈에 띄었다. 당장 먹어보고 싶었지만 다음 여행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프리드리히 다리 근처 풍경을 바라보다가 적당한 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백지 위에 그리는 것은 백지 위에 글을 쓰는 것보다는 아직 어렵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이리저리 열심히 끄적였다. 콜로나덴호프의 난간에 앉아 스프리강의 경치를 즐기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그런데 이 난간이 생각보다 높다), 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유람선을 탄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할로!!”를 외치며 손을 흔들던 중년의 아저씨, 잔디밭에 앉아 여유로운 일요일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 다리 위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행드럼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아날로그식 카메라로 흑백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 이제야 내가 원하던 ‘여유’로움 속에 마음이 편안해진 나를 볼 수 있었다.
한국 사회는 예전에도 바빴고, 지금도 바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바쁨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너무 바빠서 쉬는 게 무엇인지 까먹은 사람들도 많다. 빠르게 가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다음 역에 정차해서 조금 쉬고 갈 줄도 아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나는 독일에 살고 있고 독일 문화도 배우지만 내 삶의 근간을 차지하는 많은 것들이 한국 사회에서 배운 것들이라 여기서도 여전히 한국에 있을 때와 비슷하게 나를 채찍질할 때가 많다. 그래도 올 해를 기점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 있는 태도를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번 베를린 여행은 그 연습 중 하나였고, 나름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흔히 돈의 여유가 생기면 마음의 여유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꼭 돈의 여유로부터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비싼 옷을 사고, 공연을 보러 다니고, 유튜브를 보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놀아도 돌아서는 순간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나는 여전히 무의식 중에서 무언가에 짓눌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칫 여유로워 보이되, 전혀 여유롭지 않은 상태다. 여유가 없으니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을 일에 짜증이 더 많이 나고, 여유가 없으니 화를 더 많이 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 마음의 태도는 누구도 대신해서 바꿔줄 수 없다. 하지만 여유도 연습이 필요하다. 오늘도 나는 여유를 연습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제의 압박감에 끙끙거리며 이번 주의 에세이 쓰기를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베를린의 햇살이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때쯤 나는 또 여유를 채워줄 여행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