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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n 30. 2024

밤비노를 아시나요?



맨 처음 밤비노를 봤을 때는 아마도 대학생 시절이었을 거다. 그 때 사회 분위기는 이랬다. 



"자신만의 인생의 꿈을 찾아서 열정을 다해 좇아가라!"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서 방황하던 20대였다. 그 때는 그저 마츠모토 쥰이 좋아서 밤비노를 봤었고 재밌는 일본 드라마다, 라고 생각했던 게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밤비노를 보았을 때는 몇 년 후. 사회 생활을 시작한 후 2-3년차 때였던 것 같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재밌네 정도로 보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들이 당시의 내게 도움이 되는 말들이 많아서 우연히 큰 교훈을 얻기도 했었다.


당시 특히 인상깊었던 건 이 장면이다. 처음부터 무진장 까칠한 선배를 만나서 두드려 맞기까지 하고(지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만), 또는 자신을 전혀 상대해주지 않는 선배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밤비에게 아스카라는 또 다른 선배가 조언을 해준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성격 같은 게 아니라
내가 배울 수 있는 점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아냐?
내가 배울 만한 걸 가지고 있다면 훔친다.
그리고 기분 나쁜 감정은 그 대가라고 생각해버려.”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런 사람은 여전히 싫고,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폭력적인 태도나 말은 싫어한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사람하고만 일할 수 없는 게 사회 생활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스타일이 달라서 종종 거침 없는 성격의 사람들에게 상처받고는 한다. 그런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은 역시나 나의 몫. 비슷한 고민을 하던 당시의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밤비노를 다시 본 지금. 나는 회사를 그만 두고 무작정 독일로 와서 지금까지 일한 경력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이번에도 앞에서 봤을 때랑 비슷하게 밤비노에게 하는 조언들이 내게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건 가장 마지막 장면이다. (이 내용은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아직 안보신 분들은 읽지 말고 드라마를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 드라마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처럼 ‘사회초년생’, 그리고 조금 경력이 있는 ‘실무진’, 그리고 ‘중간관리직’, 마지막으로 ‘리더’의 캐릭터들이 모두 각자의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데에 있다. 그리고 내게는 그중에서도 ‘리더’ 역할을 하던 오너 쉐프의 이야기가 가장 와닿았다.


드라마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하면 배경은 이렇다. 주인공 밤비는 지방인 후쿠오카의 하카타 출신으로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인정받는 요리사가 되고자 도쿄로 상경한다. 밤비가 구르고 고전하며 도전하면서 성장하는 배경이 되는 레스토랑 ‘바카날레’는 ‘시시노 텟칸’이라는 오너 쉐프가 운영하는 가게다. 텟칸 오너는 밤비라는 주인공의 성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제법 성공한 오너 쉐프’로 나온다. 롯뽄기에 위치한 바카날레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실력있는 직원들을 충분히 두고 있어 오너는 실무에서 물러나 레스토랑의 큰 흐름만 지도한다. 여유롭고 성공한 자의 삶이지만, 동시에 그는 부딪히며 도전하고 있는 주인공 밤비노를 보면서 ‘부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드라마가 최종회를 맞이하면서 바카날레에 큰 변화가 찾아오는데, 그건 바로 갑작스러운 ‘오너의 자진 퇴사’이다. 텟칸 오너의 딸인 지배인은 아버지인 텟칸 오너의 퇴사 사유를 직원들 앞에서 대신 밝힌다.




“아버지는 그 연세에도, 한 번 더 처음부터 무언가 다시 해보고 싶다고,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룬 것을 지키는 인생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고, 이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도 정하지 않은 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도 즐거워 보여서, 마치 모험을 떠나는 어린 아이 같아 보여서, 차마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레스토랑의 오너는 도전하고 성장하는 밤비노를 보면서 다시 밤비노 시절로(*밤비노는 이탈리아어로 어린 아이라는 뜻인데, 드라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며, 주인공의 별명이기도 하다)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드라마의 거의 끝 부분에 가면 오너가 레스토랑 사람들에게 쓴 편지 내용이 나래이션으로 흘러나온다. 




텟칸의 편지 장면 (드라마 밤비노 중)



“바카날레의 제군들, 건강히 지내고 있나?
나와 엔도상은 이탈리아의 이스키아 섬이라고 하는
작고 작은 섬에서 가게를 열었다.
일본인이 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같은 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
가게를 열고 나서 단 한 명의 손님도 오지 않았지.
말그대로 완벽한 Away! 최고야!”



자기 나라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성공한 쉐프가 자신이 이룬 것을 모두 다 버리고 떠나 그저 단 한 명의 옛 동료와 함께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탈리아의 작고 작은 섬에서 가게를 여는 인생 같은 건, 정말 드라마니까 가능한 스토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삶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삶이라고 감명 받아버렸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법 들리지만, 내가 감명 받은 건 그것과는 좀 다른 포인트다. 마지막 편지에서 텟칸은 말한다. 최고라고.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는데 최고라고 말한다.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지만, 동료와 함께 즐겁게 파스타를 만드는 그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완벽한 Away!’. 자신이 최근까지 살아온 인생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면서 그는 행복해 한다. 



“이탈리아에서 나랑 엔도상이 배운 건 말이야, 밤비. 이 일을 계속 하는 한, 멈춰서서는 안된다는 거야. 배워야 할 것들, 알고 싶은 것들, 본 적 없는 것들, 그런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한 사람의 인생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절대로 다른 사람의 탓을 해서는 안 돼. 자신의 일이 잘 안풀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상황을 탓하거나 사회를 탓해서는 안돼. 왜냐면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이 일을 하기로. 그러니까 누구도 탓할 수가 없는 거야. 잘 안되는 건 다 내 탓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해.”



텟칸은 밤비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면서 스스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 지금 나는 멈춰서 있구나. 내가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알고 싶은 것들이,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데 어느 순간 멈춰섰구나. 나도 다시 달려야 겠다.’고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요리사로서의 삶을 이야기 하지만, 꼭 요리사가 아니라도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텟칸처럼 성공한 오너는 아니다. 중간 관리직 마저도 겪지 않고 실무진으로 한창 일할 때 쯤 퇴사를 해서 내 삶을 찾겠다며 아무런 연고 없는 타국으로 뛰어들었다. 멋지게 성공한 텟칸과는 달리 나는 도전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멋진 작가가 되어 멋진 책도 내고, 사업도 해보고, 월 천만원을 버는 디지털 노마드가 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 잘 되든 잘 안되든 결과에 상관없이 ‘밤비노 시절’은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이룬 것을 지키거나 실패에 익숙해져 현실과 타협하는 삶의 모습이 된다. 어느 쪽이든 간에 처음 도전하던 밤비노 시절과는 그 모습도 마음가짐도 열정도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텟칸과 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밤비노 시절’을 사랑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 시절이 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텟칸도 말한다. 밤비노 시절,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다고. 그래도 즐거웠다고. 나의 밤비노 시절’들’을 돌아보아도 그렇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의 내 밤비노 시기는 힘들긴 하지만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다. 그리고 똑같이 즐겁다. 밤비노를 여러번 하니까 나름 요령이 생겨서 제법 즐기는 밤비노가 되어버렸달까.



독일에서 두번째 유학을 하고 있는 지금의 밤비노 시절이 즐겁지만, 그래도 후회되는 순간도 물론 있었다. 해가 갈수록 멋지게 실적을 내고 연차가 쌓이고 승진하고 점점 더 잘 나가는 옛 선배와 동료들을 볼 때면 축하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도 계속 일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에 부러움과 후회가 뒤섞여 괴로울 때도 있었다. 당시에도 내 나름의 답을 내어 고비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지만, 오늘 밤비노의 최종화를 보면서 그 때의 그 마음이 생각나면서도 동시에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밤비노를 보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명확히 알게 됐달까.

말하자면 나는 그 때 떠나지 않았어도, 지금의 나이에도 떠났을 사람이다. 나는 그 때 도전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나이에도 도전했을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만약 그 때 퇴사하지 않고, 독일에 오지 않고, 회사를 계속 다니고 경력을 쌓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37살의 나이에 퇴사하고 새로운 도전을 했을 거다. 그 때의 나도 월천만원까지야 벌지 못했지만 제법 괜찮은 연봉을 받고 회사를 다니고 있었지만, 미련 없이 떠났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지위를 가진다고 해서 떠나지 못했을 내가 아니다. 



그걸 이제야 알겠다. 이 나이에 밤비노를 다시 보면서, 저 나이에 모든 걸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텟칸이 멋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 나를 보고서야 깨달아버렸다. 나는 계속 도전하는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20대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도전하는 시기니까 몰랐던 것 같다. 30대에 접어들 때 쯤에는 한 번의 방황이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40대가 되기까지 몇 년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여전히 이 삶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마음 깊은 곳에는 그걸 알고 있어서 계속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머리로는 정작 몰라서 방황만 잔뜩 하다가 이제는 제대로 각성해 버린 느낌이다.



최근들어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의 졸업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졸업 후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기가 너무 어려워 지쳐가던 차였다. 오늘의 각성으로 이 고민도 조금은 가벼워 졌다.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하고 졸업 후를 고민하는 두번째 경험이다 보니 나이의 무게감도 더 무겁고, 앞으로의 진로를 선택하는 결정이 더욱 망설여지던 차였다. 그런데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혹은 이런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는 뭔지 모를 확신이 가슴 속에 도장처럼 쿵하고 찍히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금의 도전 끝에 어쩌면 나는 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내 도전도, 앞으로의 도전도,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밤비노 시기와 밤비노가 아닌 시기를 반복하며 내 인생은 흘러갈 것이다. 그 길에서 조금씩 지칠 때마다, 멈춰설 때마다 텟칸을 다시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경험해 보고 싶다. 내가 쓴 글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내 노래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그저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최고다!’ 라고 감탄하게 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도 찾아오기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밤비노들이 조금 더 힘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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