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Jun 17. 2024

독일 대학 병원에 가다


아직도 추워서 자켓은 필수 (c) 2024 noi


이번 금요일, 지하철에 부쩍 경찰이 많이 보였다. 얼굴에 독일 국기를 칠하고 축구공 모양 모자를 뒤집어쓰고 응원복장을 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 축구, EM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광고도 눈에 띈다.  EM은 Europa Masterschaft(오이로파 마스터샤프트)의 약자로 ‘유럽 챔피언십’을 뜻하는 독일 말이다. 2024년 유럽 챔피언십은 독일에서 주최하기 때문에 더 떠들썩한 것이라고 했다. 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내게도 그 여파가 느껴질 만큼 도시가 축구의 열기로 들뜬 게 느껴진다. 화장품 가게 앞에는 ‘저희 가게에 오셔서 EM 경기 일정 전단지를 가지고 가세요!’라는 문구가 붙어있고, 축구와 관련된 미니 게임을 준비한 옷가게도 있었다. 지하철 광고에는 ‘독일은 축구로 하나가 됩니다!’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축구팬들의 팬심을 들끓게 하는 문구가 전광판을 휩쓸고 다닌다. 술집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 한동안 큰 티비를 갖춘 술집들은 발디딜 틈도 없이 붐빌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유 따위 찾아보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이럴 때는 축구 팬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너무너무 아쉬울 테니까.



함부르크 대학병원의 정문 (출처: UKE 구글 맵 정보)



독일에서 대학 병원을 간다는 것의 의미


독일은 축구로 시끄럽지만 내 지난 한 주는 독일 대학 병원에 다녀오느라 시끄러웠다. 정확히는 최근 꽤 오랜 기간 이 병 때문에 조금 골치가 아팠다. 증상을 처음 발견한 것은 작년 초여름이었다. 마침 곧 한국 갈 일정이었어서 한국에서 피부과를 찾았다. 그때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크림제의 약을 처방해 주고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약을 발라도 전혀 낫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증상이 더 심해졌다. 결국 지난 3월에 독일에서 피부과를 찾았다. 시내에 위치한 큰 병원이었다. 의사는 친절했고, 작년에 만났던 한국 의사와는 전혀 다른 진단을 내려주었다.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기에 생각지도 못한 병명이었지만, 어쨌든 이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어 속은 후련했다. 하지만 치료 여부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좀 더 의견을 나눠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곧 전화로 치료에 대한 내용을 알려준다던 의사는 일주일이 넘어도 연락이 없었다. 독일 병원을 상대하며 일주일은 긴 시간도 아니지만, 빨리 치료를 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던 나는 일단 한 번 더 같은 의사에게 예약을 잡았다. 그제야 의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친절한 의사는 곧 소견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낼 테니 그걸 가지고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대학 병원이요?”, 놀란 목소리로 내가 되묻자 의사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독일은 한국과 달리 내가 그냥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다고 해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전문의는 일반 의사의 의뢰서(Überweisungsschein) 없이도 갈 수 있지만, 대학병원은 무조건 일반 의사나 전문의의 의뢰서를 지참해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즉, 대학 병원 수준의 진료가 필요한 경우라고 전문의가 판단한 경우에만 대학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몰랐던 게 아닌지라 처음 의사로부터 대학 병원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조금 가슴이 철렁했다. 내 피부병이 당장 큰 고통이 있거나 하는 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 병원까지 가야 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고 의사의 소견서가 도착했다. 소견서를 읽어보니 내가 처음 진료를 받을 때 설명한 내용을 최대한 상세하게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기재해 주었다. 상담을 할 당시에 나도 처음 듣는 병이라 혹여나 오해가 없도록 독일어를 못한다고 하고 영어로 상담을 했었다. 그래서 나도 이해하고, 대학병원 의사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영어 독어를 모두 써준 것 같다. 이런 점은 참 세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견서를 스캔해 두었다.




나 보험 차별 당한 건가


이번에 대학 병원 예약을 잡으면서 알게 된 건데 함부르크는 대학 병원이 한 군데밖에 없다고 했다. 어느 대학 병원으로 예약을 해야 하나 검색했는데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고 윗집 이웃에게 물어봐도 하나라고 했다. 그래도 제법 큰 도시인데 대학 병원이 하나라는 사실에 좀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고민할 일이 하나 줄었다. (여담이지만 대학병원은 하나여도 종합병원은 몇 군데 더 있다.) 전화는 싫어서 이메일로 연락을 했는데 생각보다 답변은 빨리 왔다. 그런데 의사 소견서만으로는 예약을 잡아줄 수 없다며 의뢰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용상으로는 이 소견서가 의뢰서 못지않게 알찼는데도 무조건 그 의뢰서라는 게 필수인 것 같았다. 검색해 보니 이미 진단을 받은 상태라면 의뢰서를 받는 것은 당일 방문으로도 가능한 것 같아서 소견서를 받았던 병원을 바로 찾아갔다. 그런데 또 마침 담당 의사가 휴가 중이라 의뢰서를 써줄 수 없다고 했다.


“급하신 거예요?”

“아뇨, 일정은 넉넉해요.”

“그럼 의사 선생님이 휴가에서 돌아오시는 대로 작성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네, 좋아요.”


그렇게 의뢰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의사에게 또 전화가 왔다. 미안하지만 의뢰서를 써줄 수 없다고 했다. 이유를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공보험이 어쩌고 사보험이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보험 이슈 같았다. 의사가 그렇게 말하니까 대충 그러려니 하고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집 근처에 종종 가던 일반 의사(Hausärztin)를 찾아가 자조치종을 설명하고 의뢰서 좀 써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의사는 왜 피부과 의사가 의뢰서를 써주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듣고 보니 또 그랬다. 소견서도 이렇게 공들여 써줄 정도면 의뢰서는 왜 안 써준 걸까? 일반 의사의 반응을 보아하니 으레 있는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내 추측이지만, 아마 내가 학생들만 이용 가능한 저렴한 사보험 환자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이 피부과는 사보험 환자만 받는 병원이었는데 보통 독일에서 사보험 환자는 공보험 환자 대비 특권을 누리는 병원계의 VIP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어쨌든 나도 사보험은 사보험이니까 갔는데 자기들이 생각하는 사보험은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나를 계속 받아줄 수가 없어서 (혹은 받아주고 싶지 않아서) 이 이후로는 다른 의사를 찾으라고 돌려서 권유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 피부과 인테리어가 참 고급스럽고 일하는 간호사나 의사들도 일반 병원과 사뭇 다른 고상한 분위기가 감돌긴 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보험에서 커버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자비로라도 치료비를 감당할 각오로 갔던 건데, 학생이라서 돈이 없다고 생각한 걸까? ‘나 지금 보험 차별받은 건가’싶은 생각이 들어 살짝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어차피 지금은 공보험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부디 나의 오해이기를 바라며 묻어두기로.




2년 전에 미납한 병원비가 있다고?


의뢰서를 받기 위해 굳이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가는 것도 일이었는데, 여기서 작은 에피소드가 또 하나 터졌다. 의뢰서를 써주누 의사가 갑자기 내가 미납한 병원비가 2건이 있다고 했다. 이 의사는 내가 독일에 온 이후로 제법 자주 갔던 곳이라 진료 이력이 꽤 많은데 그중 두 개가 미납이라고 컴퓨터 화면을 보여주며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공보험에 가입이 되었고 공보험은 내가 직접 진료비를 납부할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이용해 왔던 사보험은 유학생 대상 보험이라 독일 의사들이 흔히 접하는 보험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진료비를 내고 보험사에 직접 청구하는 방식으로 병원비를 결제해 왔다. 병원비도 보통 현장에서 바로 지불하는 게 아니라 후에 우편으로 청구서를 받으며 지불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내가 혹시나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면 안 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온 기억을 미간에 집중하며 떠올려보려 해도 한 번도 미납할 만한 상황은 없었다. 내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자 의사는 “네가 지금까지 병원비를 잘 내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시스템 상으로 이 두건이 미납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에 확인을 해야 한다. 집에 가서 확인해 보고 납부했다면 증빙을 제출하고, 없다면 내일 지불해 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의사의 말이나 행동은 친절했고 납득이 가면서도 귀찮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지금까지 쌓아둔 서류를 이 잡듯 뒤져서 겨우 납부한 증빙 내역을 찾았다. 정말 다행히도 잦은 해외 생활의 경험으로 그간의 계좌 이체 내역서와 공적인 서류들은 모두 다 모아둔 덕이었다. 한 건은 계좌이체를 해서 이체 내역 확인서를 보여줬다. 나머지 한 건이 웃겼던 게 2년 전에도 병원에서 미납이라고 해서 병원 창구에서 직접 현금으로 지불하고 ‘지불함(bezahlt)’이라는 서명을 받아둔 인보이스를 아직 가지고 있었다. 인보이스 구석에 ‘미납되었다고 해서 납부하고 확인함’이라고 내가 한글로 써둔 메모도 있었다. 단 한 줄이지만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 간호사는 미안해하면서 내가 납부한 내역을 다시 복사해서 보관해 두었다. 증빙 서류를 제출하니 별일 없이 마무리는 되었지만 좀 황당했다. 미납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었다면 왜 이걸 2년 동안 따로 연락도 없이 있다가 내가 찾아가고 나서야 말을 했던 걸까. 만약, 내가 그 병원을 5년 뒤에 다시 갔다면? 그래서 내가 증빙 서류를 다 처분한 뒤였다면? 아니면 내가 학생이라 재촉 안 하고 기다려 준 건가? 아니면 그냥 또 오겠지, 또 오면 그때 물어봐야지 하고 묻어놨는데 내가 그 이후로 병원을 안 가는 바람에 묻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물어볼 걸 그랬다. “이걸 왜 이때까지 말을 안 했어요?”라고. 어쨌든 이것도 일이 잘 해결이 되었으니 되었다. 좀 성가시긴 했지만 이 미납 건수들을 잘 처리하라고 일이 이렇게 된 건가 싶기도 하다.




드디어 대학병원, 그리고 기다림


대학 병원에 3월 말쯤 연락을 했는데 6월 중순으로 예약이 잡혔다. 일반 피부과 예약도 빨리 잡기가 힘든 게 독일이기 때문에 대학병원 3개월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괜히 이것저것 내 병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많이 검색하다 보면 걱정만 많아질 것 같아서 처음 진단받은 날 하루만 검색해 보고 그 뒤로 세 달 동안은 일부러 이 새로운 병에 대해서 검색해 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많은 데다, 생각은 더 많은 자신을 알기 때문에 병에 대해서는 잊고 현생에 집중했다. 그렇게 학교와 일에 집중하며 지내다 보니 3개월이 금방 갔다. 전날 저녁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필요한 서류들을 꼼꼼히 챙겼다. 신분증, 보험카드, 의사 의뢰서, 소견서. 대학 병원까지 가는 길을 미리 체크해 보고 아침에 몇 시에 나갈지까지 다 생각해 놨다.


집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중간에 환승도 해야 해서 구글 맵이 말하는 이동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갔다. 그런데 시작부터 싸했다. 한 번에 갈 수 있는 버스가 있어서 그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렸는데 올 시간이 돼도 버스가 안 왔다. 알고 보니 근처 도로 공사 때문에 정류장 위치가 바뀌었는데 그 내용이 구글맵에 제대로 공지가 안되었던 것이다. 정류장 찾다가 길에서 20분을 버리고 결국 지하철을 타서 환승을 하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자책이 시작되었다. 5분 10분 더 미적거렸던 아침의 나를 원망하다가, 전날 이동 루트를 더 꼼꼼히 확인하지 못했던 어제의 나를 탓하다가 점점 기분이 다운되는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 이런 생각한다고 해서 더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니야. 자책은 그만하고 일단 최대한 빨리 가는데 집중하자!’


처음 가보는 대학병원이라 더 긴장도 되고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다. 행여나 늦으면 예약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걸어가야 하는 구간도 공용 자전거를 빌려 타고 열심히 달렸다. 결국 4분을 늦었다. 대학병원이니 부지가 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역시나 크고 넓었다. 그래도 안내판이 이해하기 어렵진 않아서 피부과의 위치는 금방 찾았다. 이만한 상황에 4분 늦은 거면 선방했다 생각하며 접수처로 갔다. 접수를 하러 왔다고 했더니 앞에 있는 대기표를 뽑으라고 했다. 접수실 앞에 독일어로 안내가 적혀있었는데 늦어서 급한 마음에 읽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번호표를 뽑는 기계는 커다란 터치형 모니터였다. 적어도 23인치는 돼 보이는 큰 화면인데도 버튼 모양도 없고 그냥 ‘예약한 환자’, ‘예약 안 한 환자’ 이렇게 글자만 적혀 있었다. ‘예약한 환자’ 쪽을 살짝 눌러봤는데 반응이 없어서 간호사에게 다시 물었다.


“이거 어떻게 뽑는 거예요?”

“그냥 누르면 돼요.”


간호사의 말을 듣고 다시 ‘예약한 환자’를 누르니 A17이라는 번호가 적힌 번호표가 나왔다. 화면 대비 글자가 너무 작아서 터치를 인식하는 영역도 작은 탓에 처음에 눌렀을 때는 제대로 안 눌렸던 모양이다. 대학 병원에는 어르신들도 많이 올 텐데 이런 불편한 번호표 시스템이라니, 놀라웠다. 번호표를 뽑는 모니터 위에는 내 대기 시간을 알 수 있는 어플이 있으니 다운받아서 이용해 보라길래 다운 받아봤는데 대학병원은 목록에 없었다. 아마 예전에는 되다가 이제 안 되는 모양이다. 결국 예상 대기 시간은 알지 못한 채 대기실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미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와보니 4분 늦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예약 순위가 좀 밀릴 수야 있겠지만, 4분 늦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기실 모니터 (c) 2024 noi



번호표 시스템은 외국인청과 비슷해서 낯설지 않았다. 내 순서가 되면 내가 가진 번호와 함께 가야 할 방 번호가 화면에 떴다. 접수를 기다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진료를 보기까지는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접수처의 간호사분은 처음엔 무뚝뚝해 보였지만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 같아서 내 접수가 잘 된 건지 다시 물어보러 갔을 때는 접수가 잘 됐다고 상냥하게 응대해 주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졌다. 오후에 대학교 수업이 두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예약이 9시. 학교 수업이 13시였다. 2시간이 지나도 내 번호가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강사에게 늦을 것 같다고 이메일을 썼다. 그러고도 1시간을 더 기다려서 총 3시간 정도를 기다렸는데 정말 다행인 것은 대학병원이라서 그런지 자동으로 학교 와이파이 접속이 되는 점이었다. 함부르크 시립 대학들은 같은 와이파이를 공유한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쓰는 와이파이를 다른 대학에 가서도 똑같이 쓸 수 있는데, 이게 대학병원에서 될지는 몰랐다. 기다리는 동안 논문 자료 조사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그런대로 시간은 덜 지루하게 흘러갔지만, 수업 시간에 너무 늦어질까 봐 계속 걱정이 되었다. 상황을 설명하면 강사님도 충분히 이해해 주실 일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능하면 수업에 빠지고 싶지 않은 완벽주의 때문에 든 지나친 걱정이었다. 아무리 공부가 중요해도 내 건강이 우선이다. 이게 너무 당연한 건데도 나는 이 당연한 걸 가끔씩 잊어버리고 나를 너무 혹사시킬 때가 있다.




3번 방(Raum 3), 또 다른 미션


A17, Raum 3. 드디어 내 번호가 떴다. 가방을 챙겨 들고 후다닥 진료실로 향했다. 병원 특유의 무미건조한 진료실의 작은 방.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작은 침대 하나가 놓인 심플한 진료실이었다. 의사는 다행히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분이었다. 소견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나와도 내용 확인을 다시 한번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꼼꼼히 체크를 했다. 그리고는 다른 의사를 불러서 함께 내 증상에 대해 다시 확인하고 조언을 구했다. 다행히 내가 원하던 대로 치료를 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혹시 더 지켜보자고 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동안 내가 매달 사진을 찍어둔 것을 보여준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나도 평소에 볼 때는 몰랐는데 증상이 있는 부위를 사진을 찍어놓고 비교해 봤더니 확실히 그동안 병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눈에 띄게 알 수 있었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친구가 사진을 계속 찍어두라는 조언을 해줘서 해둔 건데 진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치료를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피검사, 소변 검사는 기본이고 X-ray도 찍고 MRT(MRI) 검사도 해야 한다고 했다. 일단 지금 당장은 바르는 약을 처방해 줄 거고, 먹는 약이나 주사는 엑스레이 검사를 한 후에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모든 비용은 보험사에서 커버해 준다고 했다. 엑스레이는 기다리면 오늘 찍을 수는 있지만, 언제 가능할지 몰라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었다. 만약 오늘 대학병원에서 안 찍으면 따로 내가 다른 병원을 찾아서 엑스레이를 찍고 그 결과를 다음 방문 때 가지고 와야 한다고 했다. 수업을 빠지기 싫었던 나는 그냥 엑스레이는 따로 찍겠다고 하고, 피검사와 소변 검사만 받고 나왔다. 피는 아프지 않게 잘 뽑아주셨지만 생각보다 많이 뽑아서 깜짝 놀랐다. (꽉 채우지는 않았지만 10개 정도 되는 통에 각각 뽑아서 담았다.)


또 이번에 새롭게 배운 사실은 독일에서 대학병원은 기본적으로 조언을 해주는 곳이지 지속적으로 한 환자를 담당해서 치료해 주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서는 따로 담당 피부과 의사를 찾아야 한다는 미션도 받았다. 원래 가던 곳이 있다면 거기로 가면 되지만, 나는 갔던 곳이 사보험 전문 병원이라 공보험을 받아주는 곳을 새로 찾아야 했다. 공보험이 되는 피부과 의사도 찾고, 엑스레이 검사도 받아야 하는 새로운 미션이 함께 주어졌다. 치료의 시작은 대학병원에서 해줄 수 있지만 그 이후 경과를 지켜보고 하는 건 피부과 전문의와 해야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창 밖을 보다가 (c) 2024 noi



다 잘 될 거다


다음 예약은 7월 말로 잡혔다. 엑스레이도 바로 찍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 정도 기간이 너무 길다고 볼 수도 없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비싼 건강보험료를 보고 - 그나마 학생용 사보험은 다른 공보험이나 사보험보다 저렴했지만 - 병원 갈 일도 많이 없는데 참 비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살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아플 일이 많아 유용했다. 독일 건강보험료가 비싸기는 해도 어쨌든 보험에서 대부분 치료비 전액을 커버해 주니까 그런 점은 다행인 것 같다. 얼른 모든 검사를 마치고 치료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남은 반년은 술도 못 먹고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당연히 불안과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냐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다. 현대의학적으로 아직 뚜렷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병이라 그저 몸 건강 관리 잘하면서 치료에 집중해야 할 듯싶다. 곧 졸업 논문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 스트레스가 더 커질 것이다. 그래도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을 잊지 말고, 건강을 최우선으로 사는 라이프 스타일을 다시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무리하지 말자. 즐겁게 살자. 다, 잘 될 거다.



이전 13화 정말 독일은 대학 등록금이 없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