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저녁 일을 마치고 Y와 번화가 카페에서 만났다. 어쩐지 카페가 한산했다. 거리도 평소보다 비어 보였다.
“오늘 축구 경기 있잖아요.”
Y가 말했다. 알고보니 그 날은 독일과 스페인의 축구 경기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내 주위에는 독일인이건 외국인이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전해들을 일도 없거니와 나도 너무 바빠서 낌새를 못 채고 있었다. 심지어 Y가 다니는 회사 남직원들 중 다수는 오늘 축구 때문에 재택 근무를 신청했다고 했다.
“팬존(Fan zone)에는 경찰들이 쫙 깔렸어요.”
팬존은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처럼 다같이 모여서 거리 응원을 하는 곳으로 축구 경기 관람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마련된 듯 했다. 축구에 대한 지식이 없어 이 이상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날은 도시 전체 분위기가 뭔가 평소랑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축구의 나라에 살아도 축구에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 축구와 아무 상관도 없이 살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무신경하게 살아온 내 삶에 이렇게까지 축구로 들뜨는 분위기가 밀려들어온 적은 2018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요며칠 늦은 밤까지 차 경적 소리가 끊기지 않고 들리거나 길에서 북소리가 들린 적도 여러번 있었다. 들뜨는 분위기가 설레면서도 그때까지는 그저 남일 같았다.
차를 마시고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집에 가는 길이 함부르크의 팬존이 있는 지하철역을 지나는 경로인지라 축구 경기가 끝나는 시간과 맞물린다면 미어터지는 축구팬들의 환호 혹은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카페 문도 8시면 닫는다.
지하철을 타러 이동하는 중에도 이미 스마트폰으로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멀리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러대는 것도 들렸다. 스포츠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응원의 열기는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숨은 흥부자인 나는 스물스물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독일이 주최국인 이 시점에 독일이 이겨서 승승장구한다면 우리나라 2002 월드컵 때랑 비슷한 축제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두근두근 거렸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축구 경기를 생중계로 보려면 공식 중계 채널에 돈을 내고 가입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말한 팬존, 아니면 맥주 펍 같은 곳을 가야한다. 하지만 시간상 경기는 이미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지금 갑자기 중계 채널에 가입하거나 팬존에 가거나 맥주펍에 가는 것은 무리 같았다.
결국 그냥 뉴스로 나중에 결과나 봐야겠다 생각하면서 집 근처 아시아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간장, 라면, 김, 만두를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고 있는데 마침 계산대 옆에 커다란 티비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축구가 틀어져 있었다. 점수는 1:2. 스페인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의 연장전이었다. 몇 분 뒤에 승부가 판가름 나는 상황.
계산대 맨 앞에 서있던 나, 뒤에 줄 서있던 다른 외국인 손님들, 마트 직원들 모두 눈이 티비로 향했다. 캐셔는 대놓고 내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양해를 구하고 눈을 티비로 고정시켰고, 나도 경기가 내심 궁금하던 찰나였던지라 흔쾌히 괜찮다고 답했다.
그렇게 다들 조용하지만 팽팽한 긴장감 속에 몇 분을 지켜봤다. 누가 누구를 응원하는지는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베트남 사람이 운영하는 아시아 마트라 직원분들은 대부분 베트남 사람. 나는 한국인. 내 뒤에 줄 선 손님은 독일인도 있는 것 같고 다른 나라 사람도 섞인 것 같았다. 그래도 스페인 사람은 없어 보였다. 독일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라 내심 독일을 응원하는 내 마음과 같았을까?
‘포기하지 마요 포기하지 마요’
내향형 유학생은 속으로 외쳤다. 얼마 남지 않은 몇 분 동안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달려서 어느 순간 독일이 동점골을 만드는 듯도 했다. 양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하지만 그 시도도 막혀버렸다. ‘삐이-’. 경기가 끝나는 소리와 함께 ‘삑. 삑. 삑. 삑.’ 계산대 위의 간장, 라면, 김, 만두가 차례차례 내 쪽으로 넘어왔다.
“53.46유로입니다”
“카드로 할게요.”
네모 상자 속 빨간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은 환호하고, 우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일상으로 돌아왔다. 딱히 누구도 경기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듯한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장 본 것들을 미리 챙겨온 에코백에 담아 다시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역으로 들어갔다. 플랫폼에 잠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 방송이 시작됐다.
“오늘 독일팀이 스페인팀을 상대로 뛴 축구 경기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1:2로 스페인이 이겼습니다.”
지하철역 안을 가득 울리는 경기 결과 안내 방송. 경기 결과만 알리고 뚝 끊겼다. 신기했다. 나는 오늘 독일이 축구 경기에 졌으니 귀갓길 조심해서 안전히 가라거나 하는 안전 유의 사항 공지인 줄 알았는데 전달 내용은 그냥 경기 결과가 전부였다. 전달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크게 침울하지는 않았다. 약간은 경쾌한 목소리. 독일이 패배한 게 기뻐서는 아닌 것 같았고, 역과 관련된 공지 방송이 아니라 스포츠 소식을 알리는 거라 약간 경쾌하게 말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나처럼 궁금은 하지만 축구 경기를 생중계로 보는 채널을 구독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였던 걸까?
그래도 나는 타이밍 좋게도 아시아 마트에서 마지막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별 거 아니지만, 서로 이름도 모르는 타인들과 장보다 말고 멀뚱히 서서 축구를 본 이 경험도 소소한 에피소드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관심을 안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들뜬 도시의 분위기.
아시아 마트에 서서 축구를 보는 그 짧은 순간에 만들어진 묘한 내적 친밀감.
그리고 독일이 패배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소리없이 사라져 버린 내적 친밀감.
하지만 같이 축구를 본 직후 묘하게 더 친밀하게 느껴졌던 캐셔 직원분.
더불어서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축구를 좋아하는 동창생 친구와 몇 마디라도 더 나누며 쌓아올린 내적 친밀감(이 친밀감은 사라지지 않길).
축구 경기라는 것을 통해서 여러가지 형태의 친밀감이 사람들 사이를 오간다. 크고 작은 친밀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였다가 또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친밀감만 오간다면 참 좋겠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그렇지 않은 감정들도 오갔겠지.
그래도 이렇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
맥주가 아닌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축구를 보는 경험도 나쁘지 않았던, 이번 주 금요일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