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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y 25. 2017

타향살이, 한식을 꼭 먹어야 할까?

요리 못하는 싱글녀가 독일에 갔을 때 생기는 일


 

 보통 장기간 해외에 나가서 살게 된다고 하면, 해외에서 먹지 못할 한국 음식을 원 없이 먹고 가는 게 가기 전에 하는 일의 일 순위이다. 삼겹살, 치킨, 떡볶이, 김밥, 곱창, 김치찌개 등등... 물론 독일에도 한식당이 있지만, 비싼 가격 대비 맛은 그저 그렇거나 별로고, 나는 요리도 잘하는 편이 아니다. 그렇게 독일에 가게 되기로 확정이 되고 한국에서 독일에 갈 날을 기다리던 무렵,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했다.




어차피 한국 음식을 잘 먹지 못하게 될 거라면, 
그냥 지금부터 참고 익숙해지는 게 어떨까?




 타이밍 좋게도 그 당시 내 식습관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생겼다. 10대 때부터 안 좋았던 위장이었지만 젊은 패기로 버텨왔는데, 나이 앞에 숫자 '3'이 달리면서부터 이제는 고기를 먹는 게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삼겹살을 먹을 때도 고기만 먹던 고기 성애자였는데 이제는 채소가 꼭 필요했고, 샐러드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늘어났다. 완벽하게 이상적인 식습관을 가지게 된 건 아니지만, 매번 인스턴트 음식과 바깥 음식만 먹던 나에게는 꽤 큰 변화였다.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것 까지는 아니었고, 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기 섭취를 줄여보기로 결심했다. 고기가 들어있는 음식들을 조금씩 의식적으로 먹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한국 음식 TOP 10에 들어갈만한 음식들을 독일에 가기 전부터 피하게 되었다.



'건강에도 좋고, 독일 생활에도 미리 대비하는 연습을 하자'



그래도 그중 야채김밥만큼은 비행기 타기 전 날까지 열심히 먹었던 것 같다. 그리운 김밥을 뒤로하고 독일에 왔다. 미리 연습하고 온 것은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독일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채소도 많이 들어있는 샐러드를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라, 샐러드 위주로 식사를 했다. 또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선택권이 한국보다는 훨씬 많아서 마트에서 '고기로 만들지 않은 고기'도 살 수 있었다. 주로 콩으로 만든다고 들었는데, 기본적으로 콩을 별로 안 좋아하는지라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도전 정신으로 먹어보았다. 




우측 상단 구석의 VEGETARISCH 마크가 채식주의자용 음식이라는 표시






물론 맛이 진짜 고기만큼은 못하지만, 슈니첼은 맛있었다. (소시지는 조금 별로였다...) 

초반에는 요리를 하기에 편안한 환경에 있었던 게 아니었고, 

원래도 요리를 안 하는 나인지라, 

손이 가장 덜 가면서, 고기 맛이 나면서도, 건강한 식단을 먹으려고 애쓰던 나에게 한 줄기 희망같은 제품이었다.





제일 괜찮았던 채식주의자용 슈니첼 (소장용으로 찍었던 거라 플레이팅 따위 없....)




 주로 먹었던 종류가 샐러드, 당근, 계란, 애호박, 모짜렐라 치즈, 요구르트, 바나나, 블루베리, 시리얼(유기농), 그리고 초콜릿이었다. (참고로 독일 당근이 한국 당근보다 더 맛있다. 나는 원래 당근을 안먹던 사람인데 독일에 와서 당근을 사랑하게 되었다!)





소세지가 메인이 아니라 당근이 메인인 듯한 내 점심





 가끔씩 놀러 가는 한국인 아는 언니 집에서는 늘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럴 때도 너무너무 행복하다. 오랜만에 먹는 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는지.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도 저런 방식의 채소 위주의 식단을 먹으려고 생각을 했는데, 두 달쯤 되자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에 와서 독일식으로 음식을 먹다가 건강이 확 안 좋아졌다거나, 피부가 뒤집어지거나, 알레르기가 생겼다는 경우들이었다. 내가 집에서 한국 음식을 안해먹는다고 이야기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 사람은 꼭 한국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좋다고 했다. 나는 전기밥솥도 살 생각이 없는데...  (한국에서도 햇반족(?)이었다.)





채식주의자인 독일인 친구가 차려준 샐러드 (내가 먹는 샐러드랑 다르잖아!)





  독일에는 식사를 영양가 있게 잘 챙겨 먹는 사람들의 비율이 한국보다 더 많(은 것 같)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닌지라 마트에 사람들을 유혹하는 인스턴트 음식들도 채식주의자용 음식 못지 않게 많다. 나도 시간이 있을 때야 채소 위주의 식단을 챙겨 먹는다고는 해도 생활이 바빠지자 자연스럽게 독일식 인스턴트(특히 오븐에 돌려먹는 라자냐...)에 손이 가게 되었고, 그게 내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요즘 들어 왠지 몸이 쉽게 피로해지고 기운이 없다고 느껴지던 찰나에 한국인은 꼭 한국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탈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우리가 추측했던 이유는 몸이 평생 살면서 먹어오던 음식의 종류와 영양소라는 게 있는데 그것이 갑자기 바뀌면 안 좋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평생 안 좋은 걸 먹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바뀌는 게 좋은 식단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바뀐 내 식단 (아스파라거스를 처음 손질해본 날.jpg)





 그러던 중 아주 오래전 SBS 스페셜에서 방영된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는 다큐를 하나 보게 되었다. 중국의 한 도시에서 기형아의 출산율이 급증했던 이유,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났어도 각자 다른 건강을 얻게 되는 이유, 미국의 원주민 마을에 당뇨병이 급증했던 이유, 전립선암을 의학적 치료 없이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 모든 것이 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먹는 것'으로 바뀌었고, 또다시 바꿀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나이가 들면 아프다'는 공식도 틀린 것이라 했다. '아플만하게 먹고 지냈기 때문에 아픈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찾아낸 '좋은 식습관'은 바로 '아시아의 식습관'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좋은 식습관을 버리고 서양의 자극적인 식단을 좇다가 더 많은 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늘 인스턴트 음식이 주식이었던 철없던 나도 나이가 들수록 이런 현명한 식습관을 물려준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들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장소와 상관없이 건강한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은
나를 아끼는 일이다 







텅 빈 부엌 찬장을 간장, 고추장, 된장, 식초 등으로 채워본다. 밥솥도 작은 거라도 하나 사보려고 한다. 독일어를 배우는 것보다, 돈을 버는 일 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잘 먹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 그래도 가끔 먹는 라면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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