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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n 13. 2017

내가 갑이다, 독일의 택배 기사

이런 방식으로 배송을 해도 아무도 클레임을 걸지 않는다

 독일에서 정착하면서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했지만, 대체적으로 운이 좋거나 준비를 잘 해간 편이었는데 단 한 가지 운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택배였다. 한국에서 살다가 해외로 나오면서 겪는 불편한 점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새로운 언어, 느린 인터넷, 무제한이 없는 스마트폰 데이터 요금제, 느린 관공서, 아직도 우편물로 중요한 서류를 주고받는 관습 등등. 그래도 대부분 익숙해지지는 않아도 이해는 되는 편이라서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을 해나갔는데 도무지 택배 배달 시스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택배 기사님의 행동 패턴'을 읽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조금은 이해하게 된 독일의 택배 배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느꼈던 한국 택배와 독일 택배의 다른 점은 대략 이렇다.



1. 택배 기사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주문할 때 배송 메시지라는 걸 적을 수 있다. '부재 시 전화 주세요', '문 앞에 두고 가주세요', 등등등... 하지만 독일에는 그런 게 일절 없다. 아예 입력하는 칸이 없다. 




2. 택배 기사에게서 전화가 오리란 건 절대 기대하면 안 된다.



 주문할 때 전화번호는 입력하지만, 절대로 택배 기사에게서 전화가 오리라는 걸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런 수고는 절대 하시지 않는다. 친절하게 문자까지 넣어주시던 한국의 택배 기사님들은 정말 정말 친절하신 거다. 



3. 택배를 빨리 받으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 



 이건 아마존에서만 본 것이지만, 택배를 1~2일 내로 빨리 받고 싶으면 더 비싼 배송료를 내야 한다. 평균 배송일은 3~4일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운이 없어서 꼬이면 한참을 못 받기도 하는 것 같다. (지인은 배송 도중에 물건이 파손돼서 돌아가고 다시 출발하길 반복해서 3주가 걸린 적도 있다고 한다.) 사실 나는 한국 택배 시스템이 지나치게 빠른 배송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송일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빨리 받으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구조였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첫 번째 택배를 받을 일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집을 구하고 인터넷 신청을 한 뒤에 모뎀을 소포로 보내준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딱히 빠른 배송을 요청한 것도 아닌데 아주 친절하게 바로 다음 날 배송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택배를 받기 위해 준비해야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준비가 미처 끝나기 전에 택배 기사가 다녀간 것이다.



4. 현관문 초인종 벨의 이름과 받는 이의 이름이 꼭 일치해야 하고, 문 앞에 이름을 써붙여놓는 게 좋다. (독일 가정집에는 302호 같은 '호수' 개념이 없다)



현관문 초인종의 벨 이름은 이사를 하는 날 집주인이나 관리자가 바꿔주었다. 그런데 내가 그동안 방문했던 독일에서 사는 친구 집 건물에는 보통 문 앞에 이름이 붙어있었는데, 내가 이사 온 건물은 대부분 이름을 붙여두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이름 표시를 소홀히 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뒤늦게 확인한 우편함에는 '수신인을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이 택배를 찾으려면 자기네 사무실로 직접 오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한국이었으면 이런 경우 전화나 문자를 해서 연락이 오겠지만, 앞에 2번에서 말했듯이 전화 같은 건... (생략) 참고로 이 경우 일정 기간 내에 찾으러 가지 않으면 보낸 이에게 자동으로 반송이 된다.

 


이름 표시가 없는 이웃집 현관문







5. 내가 집에 있어도 우리 집으로 안 오고 다른 집에 맡기기도 한다.




초라한 우리집 현관문




 

위의 사건 이후로 나는 연습장에 내 이름을 적어 문 앞의 틈새에 끼워두었다. 그리고 두 번째 택배를 기다렸다. 두 번째 택배는 아마존에서 시킨 로봇 청소기였다. 중고를 구매해서 이 녀석만 따로 배송이 되었는데 4일 뒤에 오는 다른 녀석들보다 하루빨리 와서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택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후 3시가 되어도 초인종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불안한 마음에 메일을 확인해 봤더니 이미 배송 완료라고 떴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난 분명 아무 소리도 못 들었었다. 게다가 여기 초인종 소리는 매우 커서 안 들으려야 안들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 이해가 안 가서 혼자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날 오기로 한 나머지 택배들이 걱정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들을 주문한 거라 그 무게가 제법 나가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택배 사무실로 찾으러 가야 하는 건가? 안돼...' 
'나는 분명 집에 있었고 이름도 써붙여 놨는데 왜 못 찾은 거지?' 




 첫 번째 기억 때문에 이번에도 우리 집을 못 찾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집 빌딩의 초인종 벨은 좌우로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 습관적으로 문을 여는 왼쪽을 먼저 쳐다보게 되는데 내 이름은 거기에 없다. 



'그렇다면 택배 아저씨가 뒤에 있는 내 이름을 못 보고 그냥 간 걸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다시 연습장을 꺼내고, 구글 번역기의 힘을 빌려 아래와 같이 독일어 문장을 하나 적어서 내려갔다. 



내가 꽂아놓은 메모 아래에 다른 집의 메시지도 보인다. 이 분은 집이 반지하인데 택배 기사들이 자꾸 벨을 못찾는 것 같았다.




Haben Sie nicht den Namen gefunden, was Sie suchen? Bitte umbrehen!



한국어로 풀이하자면, "찾으시는 이름을 못 찾으셨나요? 그럼 뒤를 돌아보세요!"였다. 바람의 도시인 함부르크에서 이 녀석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내일 아침까지만 버텨줘, 라는 마음으로 고이 꽂아두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뭔가 마음에 걸려서 우편함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이런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Reck에게 맡겨둠





... 왓?




할 말을 잃었다.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도, 독일인의 사고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집에 있는데 왜 초인종도 한 번 안 누르고 다른 집에 맡겨두는 것인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에까지 미치며 독일인 친구에게 물어봤다.




나: 있잖아, 나 도무지 여기 택배 기사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나: 내가 집에 있는데 왜 택배를 다른 집에 맡긴 건지 이유를 모르겠어
독일 친구: You're not alone! NO one understands how or what they're doing



영어의 어감이 살아야 하는 문장이라 영어로 그대로 옮겨봤다. 이 말인즉슨, 



너만 그런 게 아냐. 아무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혹은 뭘 하는지 이해 못해, 아무도.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독일인 친구의 명쾌한 대답에 위로(?)를 받고 내일은 기필코 택배를 받으리라는 다짐을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내가 꽂아놓은 한 줄짜리 안내문은 이미 바람에 날려가고 없었다. 그래도 일단 기다려 보았다. 다행히 초인종이 울렸다! 혹시나 또 남의 집에 갖다 줄까 봐 부리나케 달려 내려갔다. (우리 집은 4층이다) 다행히 다른 집으로 새지 않고 중간에 만났다. 일단 계단 중간에서 짐을 내려놓더니 바코드를 찍으면서 사인을 받는다. (왜 우리 집까지 안 올라가고 여기서 사인을 받는 거지, 이거 내가 다 들고 올라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독일말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더듬더듬 거리며 "저 독일어 못해요..."라고 했더니 뭔가 "그래도 하긴 하네? 그러니까 말이야 ~"라고 계속 독일어로 이야기를 했다. 눈치껏 알아듣기로 "다른 집 택배가 하나 있는데 네가 좀 맡아줄래?" 같았다. 일단 알았다고 하고 사인을 했다. 나는 그제야 이 분들의 행동 패턴이 이해가 되었다. 어제 온 내 택배도 이런 식으로 다른 집으로 넘어간 거였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함부르크에 사는 다른 한국인 언니 집의 사정도 이해가 갔다. 이 언니는 재택근무를 해서 집에 주로 있는데, 택배 기사들이 맨날 이 언니 집 초인종을 누른다. 이 언니가 집에 있는 걸 아니까 맨날 이 집에 맡기는 거다. 어쩔 때는 택배 받을 사람들이 집에 있는데도, 이 언니 집 초인종을 누른다. 언니가 나가서 택배 기사와 이웃들 사이에 짐을 전달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란다. 언니도 일하느라 바쁜데, 자꾸 왔다 갔다 해야 해서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그랬다.



독일의 택배 기사들은 한 건물의 택배를 한 집에 몰아서 맡기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한국의 아파트 같은 주거용 건물이 없어서 경비실의 개념이 없다. 먼저 연락이 닿았거나, 아님 더 낮은 층수에 살거나 하는 집에 택배를 맡기고 메시지를 우편함에 넣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니 택배가 올 예정이고 초인종이 울리면, 일단은 가능한 빠르게 뛰쳐나가야 할 것 같다. (우리 집 벨을 눌렀어도 우리 집까지 올라오는 중간에 다른 집 사람도 받을 게 있었다면 그 집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웬만하면 택배 시킬 일이 없기를 그냥 바라고 있다. 




6. 그리고 결론은 택배 기사가 갑이다. 



이런 방식으로 배송을 해도 아무도 클레임을 걸지 않는다... 난 사실 한국의 택배 배송 시스템도 여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국은 택배 기사에게 너무 잔인한 시스템이고, 독일은 소비자에게 너무 불편한 시스템이다. 이 중간의 그 어딘가로 두 나라 다 바뀔 수는 없는 걸까... 





아참, 한 달 뒤에 한국에서 보낸 국제 택배가 오는데... 부디 무사히 도착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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