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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04. 2022

그래서 고추장은 안 챙겨 갈꺼야?

남아공 여행의 시작, 홍콩 공항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타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라니. 심지어 첫 여행을 6개월이나 보낸다고, 또 나름 언어 공부하러 간다고 떠나기에 짐이 생각보다 많았다.


‘무겁다, 무겁다. 통과할 수 있을까.’


내가 끌고 가는 내 짐인데 왜 내가 짐에 끌려 다니는 느낌인지 모르겠다. 그러다가도 손에 꼭 쥐고 있는 스무 살 첫 여권과 무엇보다도 ‘Cape Town'이라고 적혀있는 비행기 티켓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설레어 여기가 한국인지 남아공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부모님이랑 친척들 얼굴만 보면 걱정이 앞선다.

’아, 어떡해.. 혼자 아프리카까지..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런데 고개만 획 돌려 공항, 카운터, 스튜어디스 언니들, 이민가방 6개씩 끌고 다니는 사람들, 반투명색으로 가려진 자동문 사이로 살짝씩 보이는 입국심사대를 보면 또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고 궁금해 죽겠다.

 

분명 엄마와 동생, 가족들 얼굴을 볼 땐 헤어지는 마음에 슬펐다. 그런데 뒤를 돌아 여권을 검사하는 선생님이 보이자마자 엄마의 얼굴이 사라진다. 인간은 정말 망각의 동물인가.


검색대 위에 올려놓는 내 가방, 그걸 찍는 카메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통과할 땐 괜히 긴장되던 기다란 검색대까지.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가 신기하게 내 머릿속에 그대로 프린트되고, 드디어 내 눈앞엔 말로만 듣던 면세점이라는 곳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 사람이 처음 시골 5일장을 경험하는 것과 시골사람이 처음 서울 구경할 때의 느낌 중 지금의 내 기분은 어떤 것에 더 가까울까? 다르긴 한 걸까? 아님 같을까? 면세점이 그랬다. 그러나 나에게 면세점은 시골 장터보단 재미가 덜한 곳인지, 처음엔 휘둥그레지던 눈동자도 시간이 지나자 여기가 저기처럼 보이고 흥미가 떨어졌다. 무엇보다 짐은 지금도 충분했다. 나는 지금 처음 타보는 국제선, 처음 가보는 아프리카가 궁금할 뿐이다.

 

드디어 인천에서 케이프 타운에 닿기까지 세번을 타야 하는 비행기 중 첫 번째 비행기에 탑승했다. 지도를 펼쳐보면 케이프타운은 저어어어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왼쪽으로 쭈욱 정반대로 날아간 뒤, 다시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면 아프리카 대륙 가장 끝에 남아공, 그리고 케이프타운이 있다. 여러모로 정반대 편으로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한 번에 가는 비행기는 아직까지 없다. 사실 가능한 비행기가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 누구든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싶진 않을 것 같았다. 짐만 없었다면 가는 길목마다 멈출 수 있는 전 세계 공항들은 다 찍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에겐 끌려 다니는 내 짐들이 있었고, 그 짐들은 서울에서 홍콩, 홍콩에서 요하네스버그, 그리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이동할 계획이었기에 나의 일정도 내 짐에 맞게 움직여야만 했다.

 

홍콩까지 가는 아시아나 항공 승무원 언니들은 참 예뻤다. 처음 타보는 국제선 비행기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고,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었다. 그 개인적인 이유란 바로 고추장. 내가 끌고 온 그 수많은 짐들 중에서도 왜 나는 과감히도, 두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고추장을 챙겨 오지 않았을까. 내가 그리도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었던가. 새삼 놀랍기까지 했다.


6개월은 어떻게 보면 너무 긴 시간이었다. 고추장 없이 살기에는.. 그런데 어차피 매일 못 먹는 것이라면 하루 더 먹든 6개월 동안 못 먹든 똑같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아공에 가는 날이 가까워 올수록 다짐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처럼 사는 거다.’

그렇다고 내가 로마 사람이 될 순 없겠지만 남아공에서 한국에서 먹는 나물이나 김치나 고추장, 된장은 구하지 못할 거니까 (2007년엔 어려웠다 정말로). 하루나 일주일 여행도 아니고 장장 6개월이나 남아공에 살려면,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먹게 될 텐데 과감해지기로 했다. 한국에서 먹을 수 있던 음식들을 남아공에서도 당연히 먹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지금껏 내가 너무 당연하게 먹었던 음식들이 확실히 존재할지 모르는 곳에선 어떤 음식을 밥처럼 매일 먹게 될까 궁금해졌었다. 갑자기 내가 모르는 음식들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신기해졌고 못먹을 음식들보다 먹어볼 음식들이 궁금해져 한창 기대되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출국을 하루 앞둔 마지막날 바, 이모가


“너 진짜 확실해? 튜브 고추장도 하나도 안 가져갈 거야?”


라고 마지막으로 물어봤을 때, 나는 못 이긴 척 몇 개를 가져왔어야 했다. 쿨하게 이모의 그 마지막 제안도 뿌리치고 왔는데 왜 지금, 내 첫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의 이 작은 튜브 고추장의 은빛 뚜껑을 차마 못 뜯겠는지… 이건 마치 비행기 안에 손가락만 한 튜브 고추장 하나와 나, 단 둘만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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