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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l 12. 2022

인생에서 가장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언니

남아공 세 번째 달

“남아공 유학생들 사이에서 공식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뭔데요 언니? 공식? 수학?”

 

12월을 향해가는 남아공의 여름. 밖을 나서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지만 그늘에만 들어가 있으면 시원해지는,  말로만 듣던 케이프타운의 지중해성 기후 시즌이었다. 그늘 아래 있으니 선선해서 기분 좋은 날씨에 부산언니와 둘이 발코니 앉아 오후의 수다를 떨고 는 중이었다.

 

“3.6.9.”

“그거 게임 아니에요?”

게임도 맞지. 그런데 이번엔 슬럼프라는 뜻이야. 3개월, 6개월, 9개월. 그때마다 슬럼프에 빠진다는 거지. 괜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귀찮고  괜히 한국 가고 싶고 그런 느낌? 내가 지금 9개월 슬럼프에 빠진  같다.”

“아...”

 

무슨 말인 듯 알 것도 같았다. 그런 느낌...


언니. 나도 별별일을  겪어서 그런 기분  느낄  알았는데 신기하게  기분을   . 벌써 다음 주면 저도 남아공에   3개월이나 되잖아요. 진짜 많은 일이 있었어서 이제 겨우 3개월밖에  됐다는  믿기지가 않는데, 근데도  난리를 겪고도 지루함을 느낄  있다는  정말 신기할 따름이.”


그래. 특히나  유별난 일들을 겪었다 진짜. 그것도 단시간에... 심지어는 우리 학원에 처음  한국인 유학생이 독거미 물린 한국인이 진짜 있냐고 물어봐서 깜짝 놀랐어.”


언니랑 나는 서로 다른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소문이라는 것이 퍼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진짜요 언니?? 어디서 들었대요?”

당연히 독거미에 물린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워낙에 한국 사람들이 적기도 하고 특별한 이야기면 또 금방 퍼지기도 하고 그렇지.”

 

실없는 웃음이 났다. 다른 것도 아닌 독거미에 물린 사람으로 기억되다니. 언니와 나는 아직 다리 위에 선명하게 남은 거미의 흉터를 쳐다봤다.


근데 그럼 이제 다리는 괜찮은 거야?”


언니가 웃음과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요 언니. 헬스클럽도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지 알면서.  들어가  운동프로그램이 없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미스코리아래요. 큭큭. 물론 한국에서  아가씨라는 뜻이지만 웃기잖아요. 언니랑 오빠까지 헬스클럽으로 전도했으니  다했지. 학원보다  열심히 는 것 같아요.”


운동  살살해.  열정이 넘쳐서 오히려 탈이라니까.”

 

슬럼프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옆에서 걱정해주고, 힘들 옆에서 함께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지금까지 케이프타운에 있는 동안 정말 별별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나를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겼던건지...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감사한 존재였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오기까지, 언니와 오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빠네 홈스테이로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특히나 언니와 오빠,  셋은  가까워졌다. 오빠랑 언니는 같은 학원을 다니고 나만 다른 학원을 다녔지만, 그래도 오빠는 집에서 거의 매일, 언니와 오빠까지 셋은 헬스클럽에서 매주 만났다. 언니랑 오빠가 둘이 부산 사투리로 서로 티격태격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눈 앞에 케이프타운 바다도 있겠다 마치  번도 가보지 못한 부산에 있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든든한 보호자가 생긴  마냥.

 

그러던 어느 , 언니랑 오빠가 기분이 좋아 집에 온 적이 있었. 무슨 이 그렇게 행복한가 싶어 물었더니 맛있는 한국음식을 아주 배부르게 먹었단다. 한국음식이라니. 변변한 한인 식당은 커녕 한인마트도  곳에서 한국 음식이라니.


사실 나는 남아공으로 떠나올 때부터 내가 선택해서 가는 곳이니 한국 음식 말고 현지 음식을 먹으며 살기로 마음을 먹고 왔었다. 평생 사는 것도 아니고 6개월 후면 어차피 한국에 돌아갈 것이니 굳이 노력해서 한국음식을 쫓아다니진 말자고 말이다.


그런데 언니랑 오빠가 가끔씩 주말마다 “오늘은 김밥을 먹었어.” 혹은 “김치찌개 진짜 맛있더라.” 라고 말을 하면 듣고만 는 나는 나도 몰래 오빠를 째려보게 되었다. 알고보니 언니랑 오빠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다른 한국 언니네 집에만 다녀오면 한국음식 예찬을 펼쳤다. 도대체 그 언니는 어떤 언니이길래  머나먼 케이프타운에서도 한국음식을 그렇게 맛깔나게  먹을  있는 걸까?

 

궁금증이 증폭되던 어느 날, 언니와 오빠가 처음 보는 언니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그 언니가 한국음식 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언니랑 오빠한테 언니 이야기 엄청 많이 들었어요. 진짜 만나 싶었어요. 오빠랑 언니가 언니네 집에만 갔다 오면 언니 한식이 어찌나 맛있다고 하던지 정말 얄미웠다니까요.”


언니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언니 이야기를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부산 언니랑 오빠랑 있을 때면 항상 같이 있었던 사람 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안녕. 네가 써니구나. 나도 네 얘기 아주 많이 들었지. 독거미부터 도둑까지. 그런데도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밝은 아이라더니 정말이네. 만나서 반가워 정말로.”

 

그렇게 우연히 우리  발코니에 놀러  언니는 우연치 않게 나눈 빨강머리  이야기로 급속하게 가까워진 뒤, 요새 부산 언니와 함께 369 슬럼프에 빠진 이야기, 앞으로 언니도 우리와 같이 운동하자고 약속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케이프타운에서   명의 좋은 언니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렇게  만나자며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언니가 말했다.


“다음 주 토요일이 네가 남아공에 온 지 3개월 되는 주라면서. 언니가 맛있는 김밥이랑 다른 한식도 만들어줄게 우리 집에 놀러 와. 파티하자. 정식으로 초대할게:)”

 

언니의 그 말은 나의 3개월 슬럼프환한 줄기 같은 행복을 가져왔다. 언니가 차려주는 한식파티라니! 언니의 한식만 생각하면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처럼 마음이 두근두근했는데, 한켠으론 남아공에   3개월이 되는 날이 다가온다는 것에 긴장되기도 했다. 남아공에 오고나서부터 첫째 , 둘째 달에 항상 무슨 일이 생겼기에 혹시나  번째 달에도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싶은 괜한 노파심 때문이었다.


렇게  번째 달이 기 며칠전부터, 생전 아프지 않던 치통이 생겼다. 게다가   없는 피부 알레르기 같은 증세가 다리에  퍼졌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이번  예산은 이미 잔고를 드러낸 상태라 치통은 어떻게 며칠 으면 나을까 싶었는데, 알레르기 증세는 혹시나 거미의 독이 남은  아닐까 싶어 도저히 병원을 가지 않을  없었다.

 

독거미 사건 이후로 나는 항상  방과 거실, 부엌의 청결을 유지했으며 언제나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샤워도 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지만 그저 빈대에 물렸다고 했다. 한국에선 말로만 들었지 빈대나 벼룩이 이렇게 온몸을 지배할 정도로 작은 알갱이를 다닥다닥 퍼트릴 줄은 몰랐다. 그렇게  다리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살색이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독거미와 빈대의 흉터로 덮인 다리가  다리이긴 지만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남아공에서의  번째  행사를 빈대와 치통으로 자축하면서 부산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 병원 에피소드를  고 나서는 언니가 말했다.


“아이고. 고생했다. 언니가 맛있는 점심 사줄게. 월요일에 보자. 큰언니가 너한테 주라고 한 것도 있으니까.”

 

그렇게 찾아온 월요일. 부산 언니와 오랜만에 인도 음식점을 찾아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힘든 일이 생기면 자석에 끌리듯 언니에게 찾아가서 슬픈 감정들을 털어놓는 것이 뭔가 작은 의식이 되어버린  . 빈대가 도대체 뭐길래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거미까지  열변을 듣던 언니가 이야기가 끝날 즈음 나에게 물었다.

 

수고했다. 에고. 그래서 치통은 괜찮은 거야?”

. 그건 이제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어요. 아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랬던  같아요. 거미 때문에 치료받은 것만 해도 병원비랑 약값이 무서워서 도저히 치과까진  가겠더라고요. 대신 거미가 아니라 ‘빈대라는 아주 대단히 ‘감사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에요. 집에서 누룽지 비슷하게 끓여먹었는데 나름 괜찮았어요.  여기서 살다  거의 민간요법 치료사   같아요.”


참새처럼 쫑알쫑알 보고하는 나를 보며 웃던 언니가 말했다.


큰언니한테 말했더니 언니가 엄청 안타까워하더라.  몸이 아프냐고 걱정된다고 이거 전해 달래. 네가 치과엔    같다고 하니까 엽서랑 치통 약이랑 같이 너에게 전해달라고 했어. 토요일에 언니한테 가긴  테지만 그래도 오늘 집에 가면 언니한테 엽서랑   받았다고 전화라도 하렴.”


언니가 건네 준 봉지에는 치통 약과 함께 큰 언니가 적어준 작은 엽서가 있었다.


“Danger 많이 먹었구나! 언니가 아파봐서 잘 알고 있어. 신경 많이 쓰지 말고, 죽 만들어 먹어야 해. 파란 약을 먼저 투약하고 (1알씩), 별로 통증이 완화되지 않을 경우에 초록 약을 투약해봐. (초록 약은 아주 강해서 조심해야 해) 빨리 통증이랑 이별하길 바라!”


세심하게 약한 약과 강한 약에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언니의 엽서에 치통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완전 감동이에요 언니. 알겠어요. 지금 당장 전화해봐야지.”

 

언니 번호를 받아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 링.... 리리링.... 리링....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수신함으로 넘어갑니다.”


몇 번을 다시 걸어 본 전화.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수신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넘어가버렸다.


“언니가 바쁜가... 전화 안 받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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