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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ug 17. 2022

에필로그: 이십 대를 가득 채운 스무살 1년

서른다섯과 스물의 연결고리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한국에 있는 것이 꿈인지 남아공에 다녀왔던 것이 꿈인지 한동안 헷갈렸다. 스무 살이었고, 처음 살아본 다른 나라였고, 가장 긴 시간을 머물었던 첫 해외생활이었다. 정신이 없던 차에 나의 현실감을 천천히 돌려준 것은 바로 복학 준비였다. 학교에 다시 복학 신청을 하고 나니 기숙사부터 수강신청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놓칠 일정들이 하나 둘 쌓여갔다.


마침 설날도 다가와 남아공에 다녀온 인사를 모든 친척들에게 한 번에 드릴 수 있었다. 반년 사이에 못 보던 흉터들이 가득한 왼쪽 다리를 보며 친척들은 내가 정말 남아공이라는 그 먼 나라를 다녀오긴 다녀왔나 보다고 놀라워했다. 거미와 도난과 언니의 일까지 듣고 나선 그런 곳엘 왜 갔냐고 나무라시기도 했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는 돌아오라고 말을 안 하던데요?”


그러더니 모든 이모들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이구. 그걸 그대로 믿었어? 너희 엄마가 네가 남아공 가고 나서 그런 소식 들을 때마다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알아?”


문득 그 소리를 듣는데 남아공 길거리에서 만나 내가 독거미에 물렸을 때 구해준 아주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You are so naive!”

(너 정말 순진한거야 멍청한거야!)


정말 나는 속도 없는 스무 살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정말 돌아갈 일 정도는 아니고, 또 엄마도 괜찮은 줄로만 생각했었다. 해외로 훌쩍 혼자 처음 떠나버린 딸이 한 달에 딱 한 번씩 전화를 하는데, 전화가 올 때마다 사건 사고에 휘말려 있으면 엄마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걱정이 될 때마다 마음껏 전화를 해서 체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을 속 편하게 와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걱정일 뿐인데, 그것마저 엄마보다 당사자인 내가 더 많이 두려울 때가 있었으니 엄마는 걱정을 표현하기보다 숨기기를 선택하셨던 것 같다.


엄마의 걱정은 혼자서 열심히 나를 위해 기도하며 다스리고, 나와 전화를 할 때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결같이 같은 응원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엄마의 그 현명한 선택과 나의 그 유별난 순진무구함 덕분에 나는 운이 좋게 그런 우여곡절들을 겪고도 다시 이렇게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남아공에서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과 더불어 엄마의 기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해리포터의 부모님이 해리를 지키며 남긴 이마 위의 번개 문양처럼 내 몸 주변에도 엄마의 기도로 인해 만들어진 보이지 않은 방패막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판타지 세계를 꿈꾸던 나에게도 사실은 마법 같은 일들이 내 주변에 항상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떠올려 보았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거나, 응원을 보내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모두 좋은 마법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와 전화를 걸어서 들리는 부산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내가 케이프타운에 있었던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이제는 작년이 되어버린, 빼곡히 적힌 내 다이어리를 봐도 나는 생생히 그곳에 있었다.


모든 것이 생생했지만 수많은 말들 중에 오빠가 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사건 사고를 당해도 또 그렇게 호기심에, 에너지에 주체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어느 날은 오빠가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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