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 나는 너를 탐독한다

by 드작 Mulgogi

5월 13일. 가이드 교육을 가는 날 아침.


계절의 여왕이라는 명성에 맞게 아일랜드 오월의 날씨도 눈부셨다. 급하게 교육 장소로 가면서 핸드폰을 확인하다 그만 발목을 삐끗 접질렸다. 발목이 부어올랐지만 어떻게 잡은 가이드 교육 기회인데, 못 간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꾹 참고 교육 장소로 향했다.


오늘 누군가는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겠구나. 눈부신 햇살에 툭툭 부서지는 나뭇잎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 채 일을 했다. 연풍에 한들한들 초록 들이 춤을 출 때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웃음. 따스하고 부드럽고 무엇보다 착한 미소, 그런 미소를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수일 만에 헤어졌다.


아쉬워하지 말자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달래 보는데 자꾸 생각이 난다. 그저 친구로 단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이리 금사빠였던가. 여하튼 이상형을 만났고, 나는 연모라는 일방을 마음에 들여놓게 되었다.


접질린 발목이 교육이 끝나가는 저녁이 되자 퉁퉁 부어올랐다. 아침에 병원을 갔었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미련 곰탱이. 앞으로 가이드를 하려면 발이 튼튼해야 하는데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다치다니 너무 속상했다. 집에 와서 얼음찜질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고, 다음날 어학원 바로 옆에 있는 한의원에 가보기로 했다. 더블린에도 오리엔탈 하스피털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진료 후 1시간씩 마사지를 받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역시 신은 밀당을 잘해. 한 삼일은 달뜬 마음으로 JOB 기회도 주시고, 좋은 친구도 소개해주시더니. 또 이렇게 한 닷새는 친구와 만나자마자 이별, 그리고 발목까지 접질려 아까운 돈만 쓰게 하시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며칠 밤낮을 보냈다.


하루는 밤은 깊었는데 잠은 오지 않아서, 짧은 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영감을 받은 체코 친구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만나기 이전에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했다. 이 짧은 만남에 강렬한 감정이라니 이걸 바탕으로 적어 내려 간 소설 한 자락. 그때의 감정도 사람도 사랑도 사라졌지만, 이 소설은 완성될 수 있을까?




기숙사로 올라가는 샛길이 보이는 도서관 이층 창가, 오월의 햇살이 여자의 짧은 머리에 내려앉았다. 엷은 청 스커트에 하얀색 블라우스, 연노랑 스웨터를 어깨에 살짝 걸친 여자의 피부는 조금 하얗고 얼굴은 마른 편이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만가만 짚어 가며 읽어 내려가던 여자는 책 속의 인물에 심취해 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은 까맣고 윤이 나는 여자의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하얗게 반짝거렸다. 햇살이 파도를 산산이 조각내는 듯한 눈부심에 맞은편에 앉은 다른 학생에게는 신경이 거슬렸지만 여자에게는 그저 희미한 빛의 흔들거림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는 책을 읽다가 무언가 생각에 멈춰 설 때면 검지와 중지를 톡톡 내려치고서 손가락을 멈춰 세우는 버릇이 있다. 눈을 감고서 여자는 골몰하게 남자를 생각했다. 유년의 남자는 누이와 까르르 웃으며 물장구를 치고 있다. 남자의 엄마로 추정되는 중년의 여성이 카메라를 들고 책 이편의 여자에게 곧 사진을 찍을 테니 웃으라는 눈짓을 한다. 찰칵. 순간 여자는 멈칫하고 눈을 번쩍 떴다. 여자의 갈색빛 동공은 갈 곳을 잃은 듯 초점이 없다. 정신이 번쩍 든 여자는 이윽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방금 전 읽은 것을 상상했다고 하기에는 책 속의 그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흑백 사진 속의 남자는 장난기 그득한 웃음을 머금고 여자를 향해 웃고 있었다. 토옥 톡 손가락을 내려치며 여자는 생각한다. 지금 남자가 가진 따스한 웃음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녀온 것이구나, 하고.


드르륵드르륵. 여자의 왼손에 찬 까만색 손목시계가 오후 5시 12분을 알렸다. 이제 겨우 책의 앞부분을 읽었을 뿐인데 이 책을 마저 읽고 싶은 욕망이 여자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7시가 되면 남자가 올 것이다. 그전에 여자는 눈을 감고서 남자가 걸어오는 길을 짚어 내려갔다. 길게 늘어선 돌담이 다소 느린 걸음으로 지나갔다. 채 떨어지지 않은 태양의 빛줄기가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기를 반복한다. 부드러우면서도 활기찬 남자의 발걸음이 흔들거렸다. 여자의 길고 가느다란 손은 돌담을 쓰다듬으며 남자의 발걸음을 쫓았다. 길의 코너에 다다랐을 때 남자의 발걸음이 다소 빨라졌고 여자는 남자를 놓칠 새라 다소 빠르게 손가락을 짚어 나갔다. 다시 남자의 발걸음이 보인다. 남자는 전에 없는 하얀 미소를 지으며 멀리 남자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여자에게 손을 흔든다. 순간 나뭇잎 사이로 비친 강한 햇살에 눈이 부신 여자는 앞을 볼 수 없다. 여자의 가슴은 쿵, 하고 떨어졌다.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여자의 형체를 알아보기 위해 여자는 안간힘을 썼지만 햇볕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빛에 반사되어 하얗다.


드르륵드르륵. 여자의 시계가 7시 정각을 알렸다. 여자는 보이진 않지만 어스름한 저녁의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토옥 톡.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책을 읽다 만 손가락을 내려친다. 이윽고 여자는 눈을 꾹 감은 채 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남자가 사라진 돌담에 또박또박 글씨를 새겼다.


‘나는 너를 탐독한다. 우리가 만난 이전의 시간에 대하여.......’




이 글을 쓰고 사촌 언니한테 보여줬더니 단박에 5시 12분이 혹시 어떤 날짜를 지칭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5월 12일 7시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약속 시간이었는데, 그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는데. 이걸 알아본 사촌 언니의 센스도 대단하고 웃겼다.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장님에 비유한 것이고, 호감 가는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이 궁금하듯 우리가 만나기 이전의 시간에 대해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ㅡ 정현종, 방문객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시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니까.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