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날씨는 흐렸고, 호텔을 나설 때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답사 전에 분명 일정과 동선을 계획했지만 그건 그냥 준비일 뿐, 첫 아침을 맞은 날의 여행이 좋았던 것은 고정된 계획이 없는 듯, 도착이 목적이 아닌 듯, 다섯 명이 속도를 맞춰가며 도시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로테르담 중간 즈음에 있었는데 호텔을 중심으로 11시 방향 북쪽의 로테르담 역 근처와, 8시 방향 서쪽의 에라스무스 대학 병원과 유로 마스트, 에라스무스 다리를 건너 5시 방향 남쪽 Kop van Zuid로, 네덜란드 말로 Zuid는 남쪽이란 뜻이라고 하는데 그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대중교통 노선을 잘 몰라도 충분히 우버는 탈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었는지, 정말 하루 만에 안내판에 표시된 로테르담 주요 도보 동선을 완주하고, 부사장님과 함께 삼만보 이상을 걷는 기염을 토했던 하루였습니다.
건축박물관 로테르담 한 바퀴. 걸으면서그 속도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던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행
로테르담 도보 여행
하루면 도보로 걸을 수 있는 스케일의 로테르담. 다음 여행객에게 이 동선 강추! ⓒ CHI
로테르담, 그 첫인상
로테르담은 암스테르담처럼 도시의 전형인 운하도 거의 없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도 많지 않아서, 마치 여의도 한복판에 들어선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분위기 일 뿐 개성 넘치고 때론 잔망스럽기까지 한 건물들이 모여 독특한 경관을 만들었습니다. 1940년대 독일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새롭게 재창조하며 같은 시대 복원을 택했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와는 다른 길을 갔고 지금은 유럽의 힙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는데요. 이는 로테르담 시에서는 입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도시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건축가들은 창의적인 설계로 새로운 도시 풍경을 만들려 했으며, 시민연합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새로운 콘텐츠로 도시를 실험하며 재생하는 것이 로테르담의 새로운 DNA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11시 방향 북쪽의 로테르담 역 근처로 가는 길
블락역에 모여있는 큐빅하우스, 연필처럼 생긴 레지던스, 로테르담 도서관만 보아도 30년 전의 건물인데 지금도 의문투성이의 디자인을 뽐내며 그 자체로 흥미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대중교통 일권은 로테르담 중앙역에 가서 사야는 줄 알고 첫날 아침에 역을 향해 상쾌한 마음으로 출발한 기억이 납니다.
이 곳은 2015년에 기존의 시청과 우체국에 오피스와 주거, 박물관, 카페, 상점들을 추가하여 리노베이션을 했습니다. 예전의 시청은 도시 중심에 위치한 경우가 많았으니 입지가 좋아서 리노베이션시에 84세대가 모여 사는 15층 아파트도 함께 계획되었습니다.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주거는 모든 세대가 조금씩 다르게 생겼으며 세대마다 정원이 딸린 테라스가 있는데 이는 철골구조를 응용하여 다양한 유니트 계획을 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공사기간도 18개월가량 소요되었다고 하니, 빠르게 지으면서도 다양한 평면 유형으로 실거주자나 개발자 모두에게 특별한 아파트가 되었습니다. 1층은 대형 공공 보행통로를 만들어서 티메르하우스가 도시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건축적 의지를 엿볼 수 있었고, 구조적으로도 기둥 없는 대공간을 만들어 시각적으로도 시원한 공간을 연출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컸는데 가장 실망한 장소를 꼽으라면 노란 보행 육교 프로젝트인 뤼흐트 싱얼입니다. 날씨도 흐리고 사람도 없는 데다 바닥에 사용한 목재에 칠한 노란 페인트는 벗겨져서 을씨년스럽다 느낀 것은 기분 탓이겠지요. 곳곳에 유럽인 특유의 영역 표시와 끊겨 있는 다리는 공사 중인 곳이 많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준공 사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아침이고 날이 흐려서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녁에 안 가봤는데 저녁에 힙한 분위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여행 전에 아래 텍스트를 읽고 기대가 컸던 곳이었습니다.
초기 Luchtsingel Bridge 사진. 선명한 노란 바닥 ⓒ Archidaily
영역표시로 얼룩진 Luchtsingel Bridge ⓒ CHI
이것은 수십 년 전에 분리되었던 로테르담 시내의 세 지구를 400m 길이의 육교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뤼흐트싱얼(Luchtsingel)로 명명된 이 육교는 크라우드펀딩에 의해 완성된 공공 기반시설이다. 신설된 육교를 통해 델프트세호프(Delftsehof), 다카커(Dakakker), 폼펜뷔르흐(Pompenburg) 공원, 호프플레인(Hofplein)역 옥상공원을 비롯한 새로운 공공공간들과 더불어 ‘입체적인 도시 전경’을 조성하고 있다. 육교는 ‘영구적인 시간성’이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도시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한다. 디자이너는 이 육교를 도시의 진화하는 특성과 기존 형태의 출발점이자 새로운 도구로 이용했다. 로테르담 중앙지구의 사무실 개발계획 취소로 많은 사무공간들이 이 지역을 떠나게 되었던 2011년에 ZUS는 독자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기존의 사무건물 쉬블록(Schieblock)을 활용하여, 현재 젊은 기업가들을 위한 중요한 산실이 되고 있는 도시의 실험실을 개발했는데, 이는 1층의 매장, 바, 요리 작업장, 정보센터, 다카커라고 불리는 유럽 최초의 도시형 옥상농원과 함께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전형이 되었다. 로테르담에서 가장 활기차게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델프트세호프,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해 조성되고 놀이터 옆에 채소밭으로 조경을 형성하고 있는 폼펜뷔르흐 공원이 그 뒤를 이었고, 기존의 호프플레인역 지붕은 현재 녹색 공간으로 개발되어 행사를 개최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ZUS는 또한 이 지역에 비어 있던 대형 사무건물인 호프포어트(Hofpoort)를 앞으로 2년간 개발할 예정이다. 변화된 새로운 공공 공간들은 지역을 하나로 통합시키며 자리하고 있는 뤼흐트싱얼과 더불어, 과거의 로테르담 도심을 살기 좋은 그린의 장소로 되돌려놓고 있다. 400m의 다리는 행인들을 위한 접근성을 향상함으로써 다양한 장소들 사이에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으며, 북쪽으로 폼펜뷔르흐를 통해 라우런스크바르티어르(Laurenskwartier)까지 걸어가는 노선이 되었다. 이런 특징적인 연계성은 로테르담 도시구조 내에 이 지역만의 독특한 입지를 부여한다.
로테르담 중앙역에서 중심가 배후의 주거지를 가로질러 뮤지엄 파크에 도착했습니다. 미술관 박물관이 휴관하는 월요일이라 그런 것인지 공원은 평화롭고 조용했습니다. 다음 날 이곳에 다시 와서 쿤스탈에서 전시도 보고 점심도 먹고 네덜란드 건축가협회 건물 서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Museum Bojimans Van Beuningen (1935년) ⓒ JIN
Sonneveld House 1933년에 완공된 반넨 공장 주인의 스틸 프레임 빌라 ⓒ JIN
Het Nieuwe Instituut 1993년이 지어진 네덜란드 건축가 협회로 수도인 암스테르담이 아닌 로테르담에 위치 ⓒ JIN
1968년에 완공된 에라스무스 대학병원은 유럽에서 가장 큰 메디컬 센터 중 하나로 네덜란드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의료 침상수를(1320) 보유한 병원입니다. 한국 병원과 마찬가지로 의료환경 변화에 따라 수차례 증 개축을 반복하였습니다. 특히 2005년과 2018년 사이에 가장 복합적인 리노베이션이 있었고, 이때 주차장을 3000대 수로 확대하고 의과대학 도서관과 교육시설이 들어섰으며 뮤지엄 파크와 연결되는 축을 만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층부는 선형 아뜨리움을 매개로 신,구 병원 건물과 어린이 병동이 연결되어 있고,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 H&B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때가 되어 점심을 먹은 것 뿐인데, 생각해보면 남의 나라 병원 식당에서 첫 점심을 먹은 셈이 되었습니다.
왼쪽이 주차장과 연결된 입구 오른쪽 저층 매스는 의과대학 도서관 ⓒ JIN
뮤지엄 파크로 축을 만들어 입구로 연결 ⓒ JIN
알록달록한 타일로 마감한 어린이 병원을 아뜨리움으로 신관과 연결하고 내부를 휴식공간으로 사용 ⓒ JIN
바로 대학병원과 붙어 있는 의과대학 도서관은 학생들과 교수들 과의 관계를 조금 더 친밀하게 하고자 Integration Design으로 다양한 공용공간을 두어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의도했다고 합니다. 흰 색 천장의 은은한 빛과 분위기도 좋았지만 인상적인 점은 대 공간 안에 단차를 두어 만든 개인 학습 공간이었습니다. 휑한 대공간 안에서 단을 내려 조금 더 아늑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은 동시에창의력과집중력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Erasmus University Medical Center Library 천장의 깊이와 바닥의 단차로 단조로운 대공간에 변화를 줌 ⓒ JIN
Erasmus University Medical Center Library 큰 집 사람들을 만들어 버리는 범상치 않은 스케일의 스텐드 ⓒ JIN
공원 이름이 THE PARK인 공원을 지나 유로마스트라는 전망대에 갔습니다. 더 파크 공원은 1852년에 만들어진 로맨틱 영국식 정원으로 굉장히 평화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전망대에 올라가 로테르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대문사진에 보이는 Kop van Zuid 이 곳에서 촬영했습니다.) 1960년대 지어졌다고 하니 안전하게 보고 내려온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이 듭니다.
걷기에는 너무 멀고 다리도 건너야 해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이 곳은 1980년대에 램 쿨하스의 마스터플랜으로 조성된 항만으로 5,000개의 주거, 380,000㎡ 면적의 업무시설, 50,000㎡ 면적의 문화 시설 3,500㎡ 리테일이 들어서 있습니다. 뉴욕 호텔과 크루즈 터미널처럼 역사적인 건물도 있고 하이라이즈의 다양한 고층 레지던스와 오피스가 있는 독특한 곳이었습니다. 지반이 튼튼하지 못하니 지하를 못 파서 주차장이 지상층에 있는데, 저렇게 높은 빌딩을 연약한 인공지반에 어떻게 만드는지 흥미로운 곳이었습니다.
사무, 주거, 쇼핑, 문화시설 등 시민들이 필요한 모든 공간을 한 곳에 모아둔 로테르담의 새로운 랜드마크입니다. 해질 무렵 다리 건너 저 편에서 봤을 때는 무척이나 황홀해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내부 디테일과 마감상태가 좋지 않아 약간 실망한 건물이었습니다. 한국의 토종 핸드백 업체가 이 건물의 일부를 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OMA가 설계를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복합 시설로 수익형 부동산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신도시처럼 화려한 복합건물일 것 같았지만, 시민들이 재생하는 도시의 유휴 공간도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로테르담 지역 음식의 풍미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버려진 창고 공장을 푸드코트로 개발한 곳입니다. 다리를 건너 어렵게 도착했는데 그날 이 곳은 영업이 끝났습니다. 도시를 재생시키는 주체들이 시민과 시민연합으로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 활발한 곳은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했는데 다음에 다시 와야겠습니다.
그 날 문 닫은 Fenix Food Factory ⓒ JIN
6시면 영업 종료 ⓒ JIN
결국 이 곳에서의 저녁식사 계획은 무산되고 다시 마켓 홀에 돌아가서 저녁을 먹고 공식 일정을 마쳤습니다. 하루 만에 본 경관과 건물이 너무 많아 지금도 정리하기가 힘드네요. 하얗게 불태운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고 저녁식사 후 다시 실장 무리는 정탐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내일 아침에 부사장님을 모시고 가자며 로컬 비어로 축배를 들고 하루를 마쳤습니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날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