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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원 Apr 29. 2024

홈런이다! 외쳤는데 나 빼고 다 탄식한 날

어울리지 않는 단어


내 인생에 야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야구 중계를 본 적 없었다. 야구, 야구선수, KBO 등을 내 손으로 검색해 본 적도 없다. 살면서 들어본 이름이라곤 박찬호, 이승엽 정도. 축구는 국가대표 경기라면 TV 앞에 앉아 가족들과 보기라도 했는데, 야구는 가족 모두 관심이 없었다.


가끔 회사에서 스몰 토크 주제로 야구 얘기가 나오곤 했다. 너도 그 팀이었니, 걔네는 요즘 왜 이렇게 잘한다니. 이번에 이적한 누가 어떻다니. 그때마다 "제가 야구를 몰라서요 하하" 하고 어색하게 말하곤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경청하는 척하곤 했다. 그때도 야구를 알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서울 토박이, 처음 가 본 잠실야구장

서울에만 30년 넘게 살았는데 잠실야구장은 남자친구(현재 남편)의 제안으로 처음 가봤다. 남편은 그전 해부터 야구에 빠져있었는데, 가까운 사람이 그리 좋아하는 스포츠니 한 번 같이 가봐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직관을 가기로 한 며칠 전, 남편은 유니폼을 배송해 준다고 했다. 앞서 말했듯 야구 중계도 본 적 없었기에 유니폼은 열성적인 소수 팬들만 입는 건 줄 알았다. (유니폼은 기본이며 모두가 열성적이라는 건 이제 알고 있다) 일단 알겠다고 했다. 유니폼 뒤 마킹은 남편이 알아서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이름도 몰랐던 정우영 선수. 이젠 그가 등판하면 두 손 모아 응원한다.

그렇게 받아 든 유니폼에 적힌 이름은 정우영. 당연히 누군지 몰랐다. 남편이 응원하는 젊은 투수라고 했다. 검색해 보니 1999년생. 한참(?) 어린 나이에 한 번 놀라고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선수로 마킹한 유니폼을 입고 잠실 구장엘 갔다.


시원하게 공을 쳤는데 나 빼고 다 탄식한다

내가 얼마나 야구에 대한 지식이 없었는지 쓰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안타가 뭔 지도 몰랐고 1루와 3루도 구분하지 못했다. 투수와 포수가 같은 팀인 것도 헷갈렸다. 볼, 스트라이크는 당연히 몰랐고 이건 직관을 세네 번 간 뒤에야 이해했다. 지금 보면 간단한데 그땐 그렇게도 이해가 안 됐다. 남편은 해설자 빙의해 옆에서 모든 장면을 설명해 줬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대단하다.


타자가 공을 시원하게 아주 멀리 치면 그게 홈런인 줄 알았다. 심지어 장 외로 나갔다. 좋은 홈런 말 그대로 홈런볼인가 했다. 그래서 첫 직관 때는 일단 공이 멀리 나가면 우와- 대박인데? 홈런이다 홈런- 감탄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남편이 "저건... 파울이야"라고 했다. 어쩐지 주변 사람들이 한숨을 쉬더라.


이번엔 장 외로 나가지도 않았다. 역시 시원한 공이었다. 아주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뻗어나갔다. 그럼 나는 또 우와- 이건 몇 점이야? 잘한 거지? 물었다. 하지만 내 주위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탄식했다. 뜬 공으로 타자가 아웃되는 순간이었던 거다.


역시 야구는 나랑 안 맞아. 왜 이렇게 어려워? 속으로 생각했다. 응원하는 분위기도 재밌고 맥주도 맛있고 조곤조곤 해설하는 남편도 귀여웠지만 야구와 가까워질 수 없다고 확신했다.


심지어 이날 졌다.


처음이자 마지막 폴라로이드

첫 직관이 내게 얼마나 '비일상적' 이벤트였냐면 이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챙겨갔다. 야구장에 간다는 것 자체가 새로워서 기록해두고 싶었다.


물론 그 후론 단 한 번도 챙겨가지 않았다. 잠바에 수건에 응원봉까지 챙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폴라로이드는 사치다. 불과 1년 전인데 많은 게 달라졌다.  


살면서 처음으로 스포츠에 빠졌고 특히 절대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야구를 이토록 좋아하게 된 지난 1년의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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