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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원 May 13. 2024

잠실의 수많은 '오지환'들

선수 그 이상의 의미


야구를 보기 전엔 오지환 선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야구는 TV 중계로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삶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런 지식도 관심도 없는 채로 애인(지금은 남편이 된) 손에 이끌려 잠실야구장에 처음 간 날, 몇 가지 장면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종합운동장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오징어 판매대나 어딘가 옛스런 폰트의 '출입구' 현판 같은 것들.


그리고 앞서 가는 사람들의 등에 적힌 이름들이 그렇다. 성별도 나이도 스타일도 제각각인 관중들이 거의 다 유니폼을 입었고 각자 응원하는 선수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오지환'을 봤다.


팀의 상징, 그 이상의 의미

유니폼에 선수 이름을 마킹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여러 선수 중 가장 마음이 가는, 가장 지지하는 딱 한 명을 골라 온몸으로 응원하겠다는 거다. 야구장에 처음 갔던 내겐 모든 이름이 생소했는데, 잠실야구장의 오르막 따라 걸어가는 그 길지 않은 순간에도 몇 명의 이름은 자주 눈에 띄어 어느새 익숙해질 정도였다. '오지환'이 그랬다. 과장을 약간 보태 눈길을 돌리는 모든 곳에 오지환 선수 이름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오지환 선수는 매년 유니폼 마킹 순위 1~2위다. 그땐 몰랐다.


며칠 전 직관 갔을 때 촬영한 경기 전 사진

이젠 LG트윈스 팬들에게 오지환 선수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됐다. 2009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해 올해로 16년 차. 여러 부침과 우여곡절을 거쳐 실력과 끈기로 이어온 시간이었다. 팀의 상징 그 자체인 선수다. 작년 한국시리즈 3차전 역전 결승 홈런은 이제 자동 수식어처럼 따라붙는다. 우승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은 이 모든 스토리를 함축하는 듯했다.


사라지지 않는 마음

올해는 개막 직후부터 오지환 선수의 부진이 연일 오르내렸다. 타순이 7번까지 밀리기도 했고, 결국 4월엔 주장 완장을 자진 반납했다. 당시 오지환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주장이 돼서 팀에 부정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게 너무 싫었다." 팀의 상징인 선수가 갖는 부담감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는 말이다.


야구는 매 경기가 끝나면 팬들의 반응이 쏟아진다. 져도 이겨도 늘 여러 말들이 나오는데 한동안 특히 오지환 선수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터져 나왔다. 그때 어느 댓글 중에 이런 걸 봤다. 팬들이 등 돌려봤자 '오지환' 이름 마킹 밖에 더 있겠냐고, 힘 내달라고. 당장 실망하고 서운해도 결국 끝까지 지지한다는 얘기다.


며칠 전 남편과 직관 간 잠실야구장에서 우리 앞에 혼자 앉으신 한 팬도 기억에 남는다. 60~70대로 보였는데 연신 경기장 사진을 찍으시는 그분의 휴대폰 배경화면은 오지환 선수였다.


오랜 세월이 겹겹이 쌓인 관계

2024년 5월 12일 롯데전에서 오지환 선수는 시즌 2호 홈런을 터뜨렸다. 일이 있어 야구를 못 보다 너무 궁금해 중간에 잠깐 티빙에 들어갔더니 하필 광고 중이었다. 한데 화면 우측 상단에 6대4 스코어와 함께 이렇게 한 문장 적혀 있었다. '경기를 뒤집는 오지환의 투런 홈런'. 저 짧은 문장에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


화면 출처_TVING


오지환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 항상 팬들 얘기를 한다. 팬들에게 즐거움을 드릴 수 있어서 좋다, 다행이다, 팬들 덕분이다, 와주셔서 감사하다 같은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그런 선수에게 팬들은 행복만 해달라, 웃으니까 기쁘다, 끝까지 응원한다며 화답한다.


야구에 입문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오지환 선수와 팬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연대에 있어선 관찰자적 시선에 가깝다. 그래서 더 흥미롭고 인상 깊다. 낭만이라는 단어가 이들 사이엔 분명 있다.


화면 출처_T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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