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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6를 따라

by 황경진

여행 첫날은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밤 11시가 되어서야 첫 번째 경유지인 바스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 들어보는 도시였지만 로드 트립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나름 유명한 동네라고 한다. 미국 동-서부를 잇는 최초의 횡단 도로인 루트 66(Route 66)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스토를 출발해 뉴멕시코 앨버커키를 지나는 우리 여정의 대부분이 루트 66과 평행해서 달리거나 일부 구간은 완전히 겹쳤다. 바스토에서 시작되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I-40 고속도로가 Route 66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래전 한 예능 프로에서 여자 연예인 한 명이 루트 66을 따라 여행하는 방송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 제목도 연예인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 길을 여행하는 게 제 평생소원이었어요!"라고 감격해서 소리치던 출연자의 모습은 선명하다. 황량하고 이국적인 풍경 때문이었는지, 평생소원을 이루었다는 출연자의 환희 때문이었는지, 방바닥에 누워 심드렁하게 TV 채널을 돌리다가 뭔가에 홀린 듯 그 방송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었다. '이 길이 뭐라고 한국인에게까지 평생소원을 안겨주었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그곳이 무척 가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로망과도 같은 길을 아무 준비 없이 지나친 게 못내 아쉬워 여행을 마치고 나마 자료를 찾아보았다. 조금만 검색해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방대한 자료 중 나에게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예술가가 사랑한 길이라는 점이다.


루트 66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다. 이 작품은 1930년대 미국에 불어닥친 경제 대공황과 더불어 초유의 모래폭풍으로 경작지를 잃고 캘리포니아로 대거 이주해가는 오클라호마주 소작농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 톰 조드(Tom Joad) 일가의 여정을 통해 가난과 절망, 분노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숭고한 인류애를 그려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주민의 삶을 떠안은 66번 도로를 "마더 로드(Mother Road)"로 표현한 이래 마더 로드는 이 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500쪽이 넘는 대작을 야심 차게 원문으로 시도했다가 결국 반쯤 읽고 포기하고 말았지만 (30년대 소작농의 영어가 너무 어려웠던 탓이라고 변명해본다), 미국 역사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챕터만이라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오래전 길 위에 서 있었을 낡은 트럭 행렬과 난민촌, 음식점과 카페, 주유소의 이미지와 그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스타인벡의 탁월한 묘사력에 감탄과 찬사를 보낼 따름이다.


1930년대의 루트 66이 이주민의 슬픈 역사를 대변했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방황하는 청춘들이 도로를 점령했다. 비트 세대로 불리는 이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잭 케루악(Jack Kerouac)의 "길 위에서(On the Road)"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샐(Sal)의 미대륙 횡단기는 작가의 실제 경험에 기반한다. 안온했던 뉴욕에서의 삶을 버리고 자유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는 작가의 모습은 동시대 많은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그들은 케루악을 따라 길 위를 질주했다. 로드 트립 하면 떠오르는 질주, 도피, 자유와 같은 히피 감성의 원류에는 언제나 비트 족과 이 작품이 존재한다. 그때 그 TV 속 연예인이 그토록 이 길을 여행하고 싶었던 이유도 자유에의 갈망이 아니었을까?


이 길을 잠시 스쳐 가는 이방인으로서 한 세기 동안 이어진 정서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길이 얼마나 사랑받아왔는지는 짐작이 되었다. 루트 66은 I-40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1985년에 공식 폐지되었다. 하지만 길을 지키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이 지역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복원 운동을 벌인 결과, 대부분 구간이 "Historic U.S. 66"으로 되살아났다. 지도에는 없지만 여전히 달릴 수 있는 길, 그래서 더 매력적인 길이 된 듯도 하다. 우리가 묵었던 바스토 또한 루트 66과 함께 번성했던 곳으로 박물관과 기념품숍, 시내 곳곳에 그려진 역사 벽화가 볼 만하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런 정보를 사전에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이 역사적인 도시에서 우리가 한 일이라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서 식당에서 밥 한 끼 먹은 것이 다이다. 운이 좋았는지 옐프 앱을 통해 찾은 "Lola's Kitchen" 음식점은 놀랄 정도로 맛있어서 돌아오는 길에도 이 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결국 오며 가며 두 번을 방문하는 동안 밥만 먹고 지나친 바스토는 우리의 기억 속에 멕시칸 음식이 맛있었던 도시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IMG_1171.jpg Route 66 길 위의 낡은 모텔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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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66 위의 레스토랑과 기념품숍



전체 이동 경로

팔로알토~산타페 이동경로

첫째날: 팔로알토(Palo Alto) ~ 바스토 (Barstow): 625km

둘째날: 바스토 ~ 플래그스태프 (Flagstaff): 567km

셋째날: 플래그스태프 ~ 앤탈롭 캐년(Antelope Canyon) ~ 윈슬로(Winslow): 510km

넷째날: 윈슬로 ~ 산타페(Santa Fe, NM): 528km

총 2,220km, 2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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