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만 해도 집 문을 열고 밖을 나서면 땀이 주르륵 흘렀던 것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분다. 언제 기온이 변할지 몰라 얇은 외투를 아들 가방에 하나, 내 가방에 하나씩 들고 다닌다. 지난 달만 해도 저녁 7시면 대낮 같았는데, 지금은 저녁 6시가 지나면 해와 이별을 고하고 달이 마중을 나온다. 그렇게 아이들이 놀이터에 노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외투가 두꺼워지기 시작하면 놀이터는 외롭게 혼자 그 자리를 지키지 않을까.
이렇게 계절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니, 계절은 계절에 맞게 우리를 찾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점점 사계절의 균형은 깨지고 있지만 그래도 봄과 가을이 있어 1년을 버틸 수 있다. 그때의 여유와 부드러운 감정으로 또 여름과 겨울을 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4살인 아들은 요즘 모국어인 한국어가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가끔 이런 단어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아들에게 기분의 감정을 '좋다', '싫다'가 아닌 더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아내와 노력한다. 아들이 아내와 내가 이야기하는 단어들을 채집한다고나 할까. 어른들의 단어가 이 아이에게 한 단어, 한 단어씩 심어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단어로 점점 촘촘하게 층을 쌓아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아들도 나이가 들어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길 바라본다.
"아빠, 이제 날씨가 쌀쌀해요."
"맞아. 그래서 아빠가 얇은 외투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거야."
"이제 가을이 오려나 봐요!"
"아들. 그 말은 어디서 들었어?"
"엄마가 등원할 때 말해줬어요."
사람들의 옷차림이 길어졌고, 좀 더 계절과 맞는 색감의 복장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반팔, 반바지를 입다가 긴팔, 긴바지를 입은 놀이터의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분명 지난주에 본 아이인데도 키가 더 커 보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비단 키만 큰 게 아닐 거다. 각자 아이들의 마음도 어제와 다른 것이 느껴진다.
계절을 달라지는 그 사이의 어느 한 날에는 계절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은 휴가를 냈다. 아들을 등원시키고 간단하게 집 청소를 하고 난 후, 2025년 남은 계절을 위한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옷장은 여름 때보다 더 빽빽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들이 생기고 나서 똑같은 집에 인원이 2명이 아닌 3명이 되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아니면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많은 것을 처분했다. 실제로도 손이 많이 가는 옷들을 자주 입기에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나면 딱 한번 입거나 한 번도 입지 않는 옷들도 꽤 있다. 그런 옷들은 그 계절이 끝나면 미련 없이 처분한다. 그리고 또 1년이 지나고 나면 그 옷들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져있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렇게 단출해진 내 옷을 정리하고는 아들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내 옷보다 부피가 작은데 내 옷보다 더 많은 종류의 옷들을 가지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이제 우리 아들도 이 집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작지만 우리 집 구성원에게 있어 감히(?)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우리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계절이 바뀔 때의 엄마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지금은 물어볼 수도 없지만 내가 30년 전의 엄마의 역할을 하며 엄마의 기분을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없이 현재의 삶을 살고 있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계절에 따른 옷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여유를 부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유가 내 시선을 자식이 아닌 부모를 향해, 미래가 아닌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를. 또 내일을 나아갈 수 있는 힘이기를 바란다. 어느 따뜻한 가을날 엄마와 꼭 손을 잡고 진해 돌담길 옆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사진 찍었던 날이 떠오른다. 그 손길, 그때의 공기가 그립고 또 그립다. 너무 엄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