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내고 싶습니다
얼마 전 태국 뉴스에서 한 남자가 경찰서에 끌려가요. 남의 신발을 훔쳐서 자위를 한 거예요. 한두 번이었으면 경찰서에 끌려갔겠어요? 타인의 신발이 왜 성적 흥분을 줄까요? 어릴 때부터 신발로 맞으면서 자랐대요. 그래서 신발을 지배하면 흥분을 느낀다네요. 신발을 제압하고 싶은 욕구, 강렬한 욕구. 그 강렬한 욕구가 성욕이 되었던 거죠.
트라우마라고 하죠.
정신적 외상. 영구적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 책 '미움받을 용기'로 우리에게 알려진 심리학자 아들러는 트라우마를 부정해요. 과감하게 단순화하자면 '핑계'라는 거죠. 얼마든지 과거의 아픔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도, 스스로가 트라우마를 선택하는 거래요. 용기가 필요할 뿐이죠. 과거의 그때와 이별할 용기. 저는 어릴 때부터 '왕따' 인생이었어요. 형은 반대로 인기가 많았죠. 편을 짜서 하는 놀이에서 저는 늘 끝까지 남겨졌죠. 서로 저를 안 데려가려고 싸우기까지 했어요. 아버지는 서울 우유 배달 일을 하셨어요. 초여름 야유회를 가는데 버스 자리가 모자란 거예요. 제가 앉은자리에 또래의 여자 아이를 앉히려고 했어요. 둘 다 체구가 작으니까. 애가 비명을 지르며 우는 거예요.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려가죠. 그런 기억이 생생해요.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어요. 지금도 생생한 건,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래서인지 눈치를 많이 봐요. 남의 집에서 신세를 못 져요. 배낭여행할 때는 재워준다고 하면 감사히 묵었죠. 덕분에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나고요. 나이를 먹어서일까요? 어느 순간 가시 방석이더라고요. 부엌에서 물을 따라 마실 때, 한 밤 중에 화장실을 쓸 때, 배가 고파서 부엌에 바나나라도 있나 두리번거릴 때 조마조마해요. 그러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어딘가에 숨으려고 하더라고요. 누가 보면 딱 도둑이죠. 다시는 누군가가 저를 거부하는 상황이어서는 안 돼요. 그때 비명을 지르며 운 여자아이를 또 보고 싶지 않아요.
-쟤는 마늘 냄새가 저렇게 심할 수가 있니?
칠레에서였어요. 외국 친구가 저에게 다른 한국인 흉을 보는 거예요. 흉까지는 아니고, 마늘 향이 이렇게 강한 사람은 처음 봤다. 약간 놀라는 투라고 정정할게요. 그 한국인은 매번 고기를 사다가 직접 요리를 해 먹더군요. 마늘을 열심히 다져서요. 붙임성도 좋아서 아무나 보면 말을 걸고요. 같은 한국인이니까 저는 그 냄새가 역하지 않았어요. 한국 고깃집에서 나는 냄새 정도였죠. 그때 칠레에서 한국인이 헬스클럽에 소송을 벌인 일이 있었어요. 마늘 냄새 때문에 도저히 운동을 못 하겠다는 항의가 끊이지가 않았대요. 헬스클럽은 그 한국인에게 그만 나와달라고 했고, 한국인은 헬스클럽에 소송을 해요. 마음의 상처를 입은 거죠. 나는 몰랐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혐오했다. 결코 가벼운 문화 충돌이 아니죠. 게스트 하우스의 그 한국인은 섞이는 재주가 대단했어요. 마음에 맞는 아이들끼리 어디를 가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당당히 말했어요. 그러면 다들 흔쾌히 좋다고 해요. 표정에 미묘한 망설임이 있죠. 저는 그 표정을 보면서 손에 땀이 나요. 자신의 처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 불편하지만 좀 참아 보지, 뭐. 선의를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그 둘을 동시에 지켜보는 사람. 참 어려워요. 눈치가 있는 사람이 좋은 걸까요? 해맑은 사람이 좋은 걸까요? 체취란 뭘까요? 그걸로 우린 누군가를 거부할 권리가 있나요? 각자가 어떻게든 깨닫고 조심해야 하는 문제일까요?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이 없을 거예요. 누구나 충격적인 굴욕은 한두 번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 굴욕감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내가 누군가에도 그런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요. 경험 없이 그런 배려는 쉽게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자신을 파괴할 정도라면, 그건 다른 문제죠. 그땐 정말 용기가 필요해요. 상처도 사실은 자신을 지키려고 딱지를 만들잖아요. 즉, 보호의 과정이지, 파괴의 과정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상처가 자신을 망가지도록 놔둘 수는 없는 거죠. 우린 상처보다 상위의 개념이니까요. 우리가 주인이니까요. 내 상처에 연고를 발라줄 사람은 나 자신임을 잊으면 안 되는 거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삶은 유한하더라고요. 그런데 글이 저보다 더 오래 살아요. 요놈을 잘 구슬려서, 내 대신 세상에 남겨야겠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매일 쓰는 이유입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