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죽을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죽지 않았음에 감사합니다

by 박민우
IMG_2994.JPG 키르기스스탄 카라콜 트레킹 중 만나는 장관


정릉 계곡이었어요. 넘어가지 말라고 울타리까지 쳐져 있었죠. 어머니는 다섯 살이나 됐나? 꼬맹이인 저를 번쩍 들어서, 울타리 안으로 넘어가게 해요. 목이 마르고, 덥기도 꽤 더웠어요. 울타리 너머로는 바위를 타고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죠. 다들 목에 물을 끼얹고, 세수를 해요. 손에 물을 담아 마시기 바빴죠. 저는 엉거주춤 일어서요. 미끄덩. 그리고 힘없이 미끄러져요. 어머니 친구의 손에 매달려서 대롱대롱. 조금만 멀리서 미끄러졌어도, 아주머니의 손이 조금만 늦었어도 저는 추락했을 거예요. 바닥이 안 보이는 까마득한 절벽으로요. 너무 어린 나이여서 과장된 기억일 수도 있어요. 어머니는 기억 못 하신대요. 워낙 많은 것들을 기억 못 하셔서요. 제 기억력에 늘 완패하는 어머니인지라, 제 기억이 맞을 거예요. 글을 쓰는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요. 죽음이란 게 참 멀지 않구나.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을 줄 알았죠. 아무 소리도 안 나와요. 억. 정도? 삶의 시간이 얼얼하더군요. 죽으면 느낄 수 없었던 감정.


키르기스스탄에서 트레킹을 할 때였어요. 홍콩 국적의 피오나라는 친구와 산을 탔어요. 정상까지는 어찌어찌 올랐는데, 눈이 얼어서 내려갈 수가 없는 거예요. 쩔쩔 매고 있는데 가이드 둘이 다른 여행자들과 뒤늦게 오더군요. 다른 여행자 가이드였지만 전문가니까요. 그냥은 죽어도 못 내려간다. 살려달라. 애원을 했죠. 피오나가 가이드와 먼저 내려가요. 무섭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어요. 가이드가 설마 다시 데리러 와줄까? 염치가 있어야죠. 어떻게 내려가나 잘 봐 뒀다가, 그 길로 내려가야죠.


부웅


피오나 발이 미끄러지면서 잠시지만 공중으로 뜨더군요. 가이드가 한 손으로 냅다 낚아채요. 그렇게 또 대롱대롱. 피오나가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매달려서요. 저는 저대로 비명을 질러요. 못 내려간다. 죽어도 못 내려간다. 이틀간 왔던 길로 돌아가자. 이건 자살 행위다. 길길이 날뛰어요. 피오나는 변호사였는데, 철의 여인이었어요. 산도 저보다 잘 탔고요. 위험하다는 곳은 일부러 찾아다니는 열혈 여행가였죠. 피오나가 저 정도면, 저처럼 굼뜬 인간은 그냥 죽을 게 뻔해요. 못 내려간다고요. 죽어도 못 내려간다고요. 울부짖던 저는 다른 일행의 설득에 결국 내려가기로 해요. 눈이 없는 쪽을 골라서 후들후들 내려와요. 트레킹 용품을 빌릴 때요. 걱정 말라고 했어요. 쉬운 트레킹이 될 거라고 했죠. 가이드까지 진땀을 흘리면서 겨우 내려가는데, 참 말 쉽게 하더군요. 아무런 대비도, 긴장도 하지 않았죠. 그리고 피오나는 죽음에 반발 걸쳐서 겨우겨우 살아남았죠. 네,저도 겨우겨우 내려왔어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잖아요.


이런저런 죽을 고비를 넘긴 친구들이 많더군요. 우리는 어쨌든 안 죽었다. 떠들썩하게 자축하긴 뭐하지만, 생의 공간에 있음에 안심하게 돼요. 포탄도 떨어진 곳엔 다시 안 떨어진다면서요?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큰 위기는 없겠죠? 어제 아침에 태국 뉴스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와요. 꼭 보여줬어야 했나 싶지만, 두 발이 공중으로 냅다 솟구치는 장면을 보여주더군요. 미국 금문교 다큐멘터리가 떠오르더군요. 그 다리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해요. 머리가 긴 남자가 뛰어내리려다가 겁을 먹고 포기해요. 금문교를 왔다리, 갔다리. 결심을 굳히고, 다시 한번 힘껏!


내 목숨이 최고인 저에겐 참으로 충격적인 장면이었죠. 죽기 위해 접었던 무릎을 펴는 그 가혹한 용기. 삶의 의지에서, 죽음의 의지로 전이되는 찰나의 순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다. 삶의 공간에 51% 이상 마음이 가면, 그것대로 축복이 아닐까 싶어요. 51%가 60%가 되기를 바라면서라도 살아야죠. 지금 저는 태국 방콕이 좋아요. 따뜻하고, 너그러운 질서가 좋아요. 살고 싶은 마음이 당연한 게 아님을 명심하겠습니다.


PS 우린 오늘에서 내일로 가고 있어요. 내일에서 모레로, 2020년에서 2021년으로. 손가락에 힘이 빠지는 순간, 저는 계속 글을 쓰고 있을까요? 궁금해서 늙어봐야겠어요. 같이 천천히, 잘 늙으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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