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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ny Oct 05. 2024

나에게 미생이란?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를 읽고서

미(美)생(生)

 

 내 안에 아픔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잠시 쉬어본 적이 손가락에 꼽히는 것 같다.

나는 무교이지만, 최근에 친구가 '싯달타'라는 책이 인생에서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은 책이라고 해서 오늘 아침부터 이 심오하고 철학적인 책을 용감하게 꺼내 들었다. 소설책처럼 술술 읽히지도 않고, 중간중간 사유를 많이 하게 하는 책이지만 요즘 가뜩이나 힘든 나에게 힘을 주는 구절이 있어 소개한다. 이 깨달음은 내 글을 읽고 열심히 댓글을 늘 달아주시는 독자님께서 말씀하신 부분과 너무 일치했다. 역시 사람은 꾸준히 깨달음의 길로 정진하고 탐구할수록 "해탈"의 경지에 입성할 수 있나 보다.


<모든 것이 마치 의미 있고 행복하며 아름다운 것처럼 보였지만,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이다. 세상은 쓴 맛이었고, 인생은 번뇌였다. 싯달타 앞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해탈(解脫)하는 것이었다. 갈증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꿈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자아를 벗어나는 것, 텅 빈 마음에서 안식을 찾는 것, 자아를 벗어난 사유(思惟) 가운데서 우주의 경이에 겸허하게 맞서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자아 일체가 극복되고 소멸되었을 때, 가슴속에 깃든 욕구와 충동이 침묵할 때, 비로소 가장 궁극의 것이 깨어날 것이다.

그는 명상을 함으로써, 일체의 사물에 대한 감각을 비워버림으로써 얻어지는 해탈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이런저런 여러 길을 걷는 것을 배워 수천번 자아를 버렸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그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부터의 도피이다. 삶의 고통을 잊고 생의 번뇌를 잊으며 일시적인 마취에 빠지는 것이다. 육신을 벗어나 무아(無我)에 잠기는 것과 같은 경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싯달타' 책에서 발췌 -


 나는 얼마나 나를 버릴 수 있는가? 나를 얼마큼 버렸는가? 세상의 모든 물체와 현상은 객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형상이고, 내가 거기에 나만의 안경을 끼고 생각을 주입하고 있지 않는가? 나에게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에 내가 "힘들다"라고 느낌으로써 색깔을 입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음이 든다.

 세상에서 규정한 욕망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결혼, 명예, 사랑의 욕구 등 세상이 규정해 놓은 대로 그 길을 가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었는가? 알면서도 그 길이 다른 곳으로 향할 때 얼마나 뼈저리게 아파했는가?

 해탈은 세상이 정해놓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욕망의 전부를 포기한 것이 진정한 해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맞추어 해석해 보면 내가 얼마나 세상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지가 해탈

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하나의 주체이다. 생각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싯달타'가 말하는 "해탈"은 생각자체를 제거하라는 말과는 다른 것 같다. 즉 앞서 말한 것처럼 생각과 자아를 분리하여 생각이 곧 내가 아님을깨닫는 "무아"의 경지를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관계 지향적인 사람으로서 이혼을 하면 그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시아버님과 관계가 나빠져 더 이상 연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이 아파했다. 그렇지만 살면서 어차피 받아들여야 하는 "낭창함"을 가질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너무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질수록 인생은 고독해지는 것 같다. 꾸준히 나를 찾으면서, 나를 생각에 잠식되게 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겠다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아이들에게 많이 들려주는 "모두 다 꽃이야"라는 국악 동요가 있다. 그 국악 동요 가사는 이렇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데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정작 이 노래를 들려주면서도 내 마음을 땅이 갈라지는꽃도 채 피지 못 하는 허허 벌판으로 방치한 게 아닌가 싶다. 남들을 보살피느라 정작 내 안에 마음은 다른 의미에서 무아(無我)로 방임한 것 같다. 벼랑 끝에도 꽃이 피는 것처럼 내 마음에도 꽃 씨를 뿌려주어야겠다. 이제 끊임없이 나를 비우고 지혜로 채움으로서 세상의 어떤 풍파가 찾아와도 그것을 탄식하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낄 수 있는 용맹함을 가져야겠다.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여전히 많고 내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나의 꽃밭에 주어야 할 물을 나누어주는 우를 범하진 않아야겠다. 싯달타의 깨달음처럼 내 영혼을 고요히채우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의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미(美) 생(生)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느낌의 옷이고

사유는 나아감의 옷이야.

그 옷은 나 자신이 아니야.


세상의 옷에는 금을 칠한

번쩍이는 옷도

한 겨울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누더기 옷도 있지.

그렇지만 그 옷도 나 자신이 아니야.


세상의 수많은 길 중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오지의 길을

탐험해 가며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껍데기와 알맹이를 분리해

진정한 내 모습과 대면하는 것


세상이 설정한 덫에

걸려들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혜로운 인생이지


많은 것을 그려내기보다

덜어내고 빼서

순백(純白)에 가까운 비움이

날아갈듯한 가벼움이

미(美) 생(生)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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