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시작은 놀이요, 즐거움이다. 만화책을 보는 것도 읽는 즐거움이요,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도 읽는 즐거움이다. 읽는 즐거움에 빠져 본 사람은 평생 책과 멀어지지 않는다. 읽는 즐거움에 빠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책이 아니라 즐거운 책으로 시작하라.
처음 나는 책과 친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책을 구입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1살이었다. 하굣길 교문 앞 길가에 트럭을 세워놓고 아저씨 몇 명이, 학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수십 명을 줄 세워 주소와 연락처를 받고 ‘철제 마징가 제트 프라모델’을 공짜로 나눠주고 있었다. 당시 철제 마징가 제트는 부잣집 애들만 갖고 노는 초고가의 장난감이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종이에 몇 자 적고 공짜로 받은 마징가 제트를 두 손 높이 들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집이 가까울수록 뭔가 찜찜했다. 왠지는 모르지만 이 장난감을 엄마에게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징가 제트를 책가방 깊숙한 곳에 꼭꼭 숨긴 채 다락방으로 올라가 구석진 상자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몰래 꺼내서 팔다리를 이리저리 구부리며 만져보고 노는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나흘 지났을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린 것은 내 방에 산더미처럼 쌓인 세 상자의 책과 아버지의 회초리 찜질이었다. 철제 마징가 제트를 받는 조건으로 아저씨들에게 적어주었던 이름과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는 다름 아닌 도서 할부 계약서였다. 나는 본의 아니게 소년소녀 문학전집과 명작동화, 그리고 위인들의 전기 각 20권씩 도합 60권의 책을 덜컥 외상으로 사고 만 것이다.
그 후 1년 동안 아버지는 매달 25일까지 내야 하는 책 할부금 4,000원짜리 지로를 받았고, 나는 회초리를 든 엄마 앞에서 한 달 동안 읽은 책들은 무엇인지 검사받아야 했다.
혼자서는 잘하다가도 정작 누가 시키면 못하는 성격 탓에 1년 동안의 ‘억지 독서’가 즐거웠을 리 없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다며 엄마에게 꽤 많이 맞았던, 그래서 월말이 정말 싫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할부가 끝나는 1년 안에 60권을 모조리 읽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나는 ‘저 많은 것을 읽느니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런 심보였으니 몇 권이나 제대로 읽었겠는가.
그래도 그때 읽은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게 있으니 바로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였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그림 몇 개 없이 글로 가득한 책이 ‘전설의 고향’보다 무서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주검이 된 검은 고양이가 콘크리트 벽 속에서 울고 있던 마지막 장면에서는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엄마 다리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소설 속 고양이가 TV 화면보다 더더욱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글 속에는 그림도 있고 영화도 있다.’ 이것이 독서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