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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리메 Oct 07. 2020

이별 후 고통이 내게 찾아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따라 같이 아프다.

10년 차 간호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1



2010년 9월경 나는 또다시 이별을 경험한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신호등을 건너다 말이다. 그때 그 남자 친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명 "데리고 다니기 좋은 놈"에 속했고, 능력은 전혀 없던 놈이었다. 매일 하는 거라곤 게임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고, 잘생기고 키도 커서 내 눈에 정말 그 사람밖에 안 보이던 시절이었다. 근데, 내 친한 친구 결혼식을 갔다 온날 버스에서 계속 게임만 하던 그에게 너무 짜증이 나서 뒤도 안 보고 걸어가던 내게 신호등이 꺼지기 직전 횡단보도 중간에서 나의 뒤통수에 대고 그가 말한다. 


" 야, 너 이렇게 가면 나 다시는 못 본다. 너 그래도 그렇게 계속 혼자 갈 거야? "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듯이 끄덕거리면서 계속 횡단보도 끝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뒤도 안 보고 계속 걸어갔다. 그가 어느 정도 따라올 줄 알았던 나는 한 참 후에 뒤 돌아보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곁에 없었다. 

그 어디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없어진 그에게 자존심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내 전화를 받기는 하더라 내가 "뭐야 어디 간 거야?" 했더니, 

그가  "내가 분명히 말했지 너 혼자 그렇게 걸어가면 다시는 나 안 볼 거냐고, 그랬더니 네가 고개 끄덕이면서 혼자 걸어갔잖아"그러자, 

내가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나랑 같이 있는 내내 계속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저녁 먹고 나서 뭐라고 했어? 피곤하니까 쉬다가 가자? 또 그랬지? 나 왜 만나는데? 심심해서 만나니?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니? 아니면 자려고 만나니? 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건데, 네가 뭔데? " 

내가 막 이렇게 윽박을 지르는데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내가 조용해지니까 딱 한 마디만 하고는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여기서 끝내자, 이제 그만하자. 너랑 더는 못하겠다." 

뚜뚜뚜뚜뚜 신호음은 들리는데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정말 황당하고 어이없고 웃음밖에 안 나오는 상황에서 그래 내일이면 다시 전화하겠지 하면서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우린 진짜 헤어졌다. 




그렇게 어이없는 이별을 하고 한 달은 잘 버텼던 거 같다. 근데, 이별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내 몸 안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병 즉, 자가면역질환이라고 부르는 병마가 나를 덮친 것이다. 


처음엔 원인을 모르고 계속 아프기만 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얼마나 다녔는지 모른다. 지금이야 핸드폰으로 모든 것을 다 주문하고 사고 은행일까지 일사천리로 할 수 있었지만 10년 전엔 아직은 어려웠던 상황이라 정보도 부족했고, 병원마다 자가면역질환이라고 의심하는 의사 선생님이 안 계셨다. 


아마 다리를 다친 후에 생긴 통증이라 외과만 다녔기도 했고, 자가면역질환은 내과적인 부분이라 더 모르셨을 수도 있다. 그때 집 근처 정형외과 선생님께서 9월에 다친 다리가 아직도 아프다고 해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 엑스레이를 다시 한번 찍으면서 말씀하셨다.

 "왠지 큰 병원 한번 가보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분명 다리뼈엔 금이 가진 않았거든요. 근데 그 부위가 계속 아프신 거라면 "피로 골절"이라고 엑스레이 상에는 안 보이는데, 통증은 느껴질 때 그런 진단을 내리거든요. 큰 병원 가셔서 "골 스캔"을 한번 찍어보시길 추천드릴게요."


 갑작스러운 대형병원을 가야 한다는 소식과 왜 나는 다리를 다친 것뿐인데 점점 더 아파만 지고 나아지진 않는 건지 의구심만 계속 쌓여 갔다. 그러다 어느 날 칼로 내 다리를 찔러서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는 듯한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통증은 다리를 다친 뒤 얼마 안 되었을 때도 나타났었는데, 그 뒤로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아픈 다리의 종아리 쪽에서 뭔가 근육이 뭉치는 듯 둔한 감각이 이어지더니 점점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저린 감이 점점 심해지고, 결국은 전기가 오는 듯한 찌릿한 감각과 함께 점차 통증들이 심해져 갔다. 





이렇게 살다 간 아니, 살아가는 것조차 통증으로 밤잠을 설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 정말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정말 비참하고 너무 아프고 아프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이런 고통을 신은 나에게 왜 주시는 건지 원망조차 할 힘도 나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더군다나 나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한창 직장생활을 열심히 해서 돈을 열심히 모으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며 여러 사람들과 취미도 같이 하는 그런 풋풋하고 싱그러운 젊은 청춘들처럼 말이다. 근데, 나는 그걸 즐길 여유조차 아니 여유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조금의 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의 통증은 점점 거센 파도처럼 부위가 커져갔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이별 중 그때의 이별이 나에게 각인된 이유는 아마도 이렇게 내 인생의 큰 변곡점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별로도 힘든 나에게 몸이 아픈 고통은 정말 신이 주는 최악의 선물 같았다. 이 고통들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도 모른 체 나는 계속 병들어 가고 있었다. 매일 밤이 무서웠고, 밤이 지나가는 게 싫었다. 아침이나 밤이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외상 후 특정 부위에 발생하는 만성 신경병성 통증과 이와 동반된 자율신경계 기능 이상, 피부 변화, 기능성 장애를 특징으로 하는 질환





내게 아픔을 주고 병을 안 겨 준 사건들은 꽤 많았다. 위에 제시한 복합부위 통증증후군과 비슷한 신경병증 성 통증 이것이 점차 나아지더니 섬유근육통으로 변질되어 약은 점차 줄여갔고 그러다 통증이 잡혔으나 피로가 많아지고 감기가 자주 걸리더니  갑상선암이 내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에겐 커다란 숙제가 하나씩 놓여있는 것만 같았다. 병원에 입원까지 하며 수술도 받아야 하는 생활도 해보게 되었고, 약이란 약은 다 먹다 보니 마약성 진통제까지 먹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환자를 케어하던 간호사에서 점점 환자가 되어갔다. 


그중에서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을 앓게 되었고, 그것이 너무 빨리 발견되어서 그러니까 병이 점점 진행해서 (이제부터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을 약자로 crps로 쓰도록 하겠다.) crps가 되려던 차에 병원에서 급하게 약을 써서 그거보다는 약한 신경병증 성 통증으로 최종 진단을 받게 되었다. 

아마 약제가 나에게 안 받았다면 난 배우 신동욱 님과 똑같은 상황에 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 증상들이 약간은 나타났었기 때문에 너무 무서웠다. 

약간 살갗이 뭔가 닿기만 해도 전기가 찌릿하고 왔고, 송곳같이 뾰족한 도구로 나의 다리를 사정없이 찌른 후 왔다 갔다 하는 통증이 왔었기 때문에(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통증인데 그나마 이 표현이 제일 적절하게 표현 한 정도이다. 아마 그 통증은 이 글 보다 더 심하다고 느끼면 된다.) 그분에 비하면 난 아픈 것도 아니었겠지만 정말 극심한 통증이다. 

이 통증은 얼마나 심하냐고 묻는다면 통증의 척도가 0부터 10까지 있다면 거서 엄마가 아이를 출산할 때 통증은 8-9 정도라고 한다. 근데 CRPS는 거의 10에 가까운 통증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을까?




통증 점수표 (VAS scale)



위, 점수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것도 이별을 하고 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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