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가끔 윤성이 재우고 오후 2시가 다 돼서야 첫끼를 먹고, 온종일 먹은 거라곤 없는데도 저녁 수업할 때 배가 나와있거나 배가 안 고프거나 하면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아무도 그때 그 끼니를 먹으라고 한 적은 없지만, 아침엔 수업 전이라 먹기가 어렵고, 윤성이 하원하고는 얼른 재워야 하니 미뤄지고 그렇게 윤성이 재운 뒤에야 조용히 국에 밥 말아 첫 술을 뜨고 나면 이렇게 먹는데도 왜 살이 안 빠지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 저녁 수업 가기 전엔, 얼른 제육볶음에 버섯, 부추 넣고 후다닥 볶았고 애들은 곰탕에 소면 말고 오징어전에 부추 조금 넣은 모양새로 부추전을 부쳤다. 오징어 넣은 부추전을 너무 좋아하는데 저녁 수업 전이라 몇 젓가락 입에 넣고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수업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10시. 먹지 말아야지 그냥 자야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배가 안 고픈 게 뭔가 이상하고 억울하다. 그래서 양치질까지 다 하고서 밥그릇에 밥 푸고 차가운 제육볶음 올려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라도 깰까 봐 그래서 이 억울한 마음에 먹는 두 번째 식사를 못하게 될까 봐 아주 조심히, 냄비 뚜껑도 조심히, 숟가락도 조심히 조심히 그렇게 방에 들어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이번 회에는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얼마나 울컥하던지 울면서 야무지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러고 나니 바로 잠자리에 들기가 위에게 미안하달까? 마침 내일이 또 금요일이기도 하니 이참에 내 불안함도 낮추려 책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책을 읽다 보니, 그래 글을 써야지. 읽고 쓰는 일. 그것이 어쩌면 진짜 나에겐 배부른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노트북을 켰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배터리가 없어서 안 켜지면 그냥 안 쓰고 자야지 했는데 절반 가까이 남아있는 걸 보니, 이는 고로 오늘이 글을 쓰기에 가장 좋은 날이구나 생각 들었다.
저녁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계속 솔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제저녁 샤워하면서 뜬금없이 솔이가 말했다. '박연 후, 소미랑 사랑에 빠졌어' _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박연 후, 내가 아는 그 박연 후?
박연 후에 대해 말하자면 윤솔이 7살 인생 처음으로 솔이 마음을 설레게 한 남자 친구이다. 마스크를 껴도 벗어도 엄마 마음에는 그다지 차진 않지만 솔이에게는 너무 멋있는 친구라 연후 옷깃만 사진에 나와도 까르르 웃고, 꼭 사진첩에 저장하는 그 남자아이. 그렇게 한 동안 연후 이야기를 하면 함박웃음을 짓던 어느 날 솔이는 말했다.
'나, 고백했어' _ 간식시간에 좋아한다고 말했어.
어??????????????
그랬더니 연후가 뭐래? _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옆을 보더라?
내 딸의 마음이 나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내 딸의 마음을 얻은 연후라는 친구가 그리 반갑지는 않은데 솔이가 먼저 고백까지 했다고? 그런데 고백을 받고도 아무 말도 안 했다고? 노웨이. 안돼 안돼 연후는 안 되겠어 그렇게 용기 없는 친구는 엄마는 환영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면서 허허 웃었지만 그 상황에서 정말 내 마음을 놀라게 한 건 솔이의 용기였다. 그냥 연후를 알게 된 후부터 그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했다고 한다.
허허허 허허허 허 뉘 집 딸인지 당차네. 정말 놀라긴 했다. 솔이의 용기에 놀라기도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연후를 보고도 속상해하기는 커녕 아무런 마음의 상처도 없는 듯 한 솔이의 애정에 또 놀랐다.
그 후로도 솔이는 삐뚤삐뚤 글씨로 연후에게 좋아한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고,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그런데도 흔하게 주고받는 친구들 편지들 사이에 연후에게서 받은 편지가 한 통도 없는 게 이상해서 연후는 아직 글씨를 못쓰나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내 딸의 애정을 받았으니 영광일 테지 용기를 내거라 꼬마야 뭐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딸 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연후에게 받은 편지라며 배시시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건네는데 서툰 글씨로 '윤솔아 사랑해'라고 적혀있었다. 근데 그 종이가 꼬깃꼬깃 구겨져 있어 괜히 속상할까 봐 손으로 반듯하게 피며 솔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읽고 얼레리 꼴레리 놀려대기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윤솔이가 말했다. '근데 연후가 휴지통에서 그 종이를 주워와서 편지를 써줬다?' ____ 뭐야? 사실 이때부터 느낌이 싸하긴 했는데 뭐 솔이 말로는 선생님이 종이를 아껴 쓰라고 해서 연후가 휴지통에서 이걸 주워와 편지를 썼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솔이 표정이 뭐랄까 무슨 기분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긴 헀는데 솔직히 나는 속이 상했다. 구겨진 종이에 연애편지라...
그런데 어제저녁 샤워를 끝마칠 때쯤 솔이가 대뜸 말했다. '박연 후, 소미랑 사랑에 빠졌어' _ 오늘 간식 시간에 나한테는 말도 한마디 안 걸고 소미랑만 놀더라? 그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오늘은 연후가 다른 친구랑 놀고 싶었나 보네, 그래도 우리 솔이 속상했겠다.
오늘 하원길 차에서 솔이가 다시 말했다. 박연 후가 좋아하는 건 소 미래. 박연 후한테 물어보니 소미를 좋아한대, 그런데 나를 꼭 안아줬땅땅땅 땅.(무지 행복하게 웃으며 몸을 베베 꼬았음)
딸아 _
무슨 말을 했어야 하는지 한 참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뾰족하게 떠오르는 말이 없다. 저녁 수업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솔이의 이 말을 내내 곱씹으며 걷는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내 아이의 일.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내 아이의 삶. 아직까지는 이 한계를 마주하고 인정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연후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어대는 솔이를 보며 나도 깔깔깔 마음이 설레었고, 속상해하는 솔이를 보면서 나 역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다른 친구를 좋아한다면서 자기를 안아준 친구가 너무 좋아서 몸을 베베꼬는 솔이를 보며, 그 마음이 누구보다 투명하게 보이고 느껴져 마치 내가 솔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실이다. 하지만 솔이의 감정은 오롯이 솔이의 것.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있지만 그건 진짜 내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도 느껴지는 이 패배감, 질투심은 뭐지 ㅎㅎ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배운다. 유일한 엄마의 역할은 [아이를 믿어주는 것뿐]. 엄마가 보기에 다소 불편하고 속이 상하는 상황에서도 솔이는 경험하고 느끼고 배우고 성장하리라는 믿음. 그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건강하게 바라보리라는 믿음. 그리고 응원.
이렇게 글로 적고 보니, 이제야 마음이 한결 놓인다. 편안하다. 내내 곱씹던 그 말들이_ 밤 11시에 먹는 제육덮밥으로도 해결이 안 되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 우로도 해결이 안 되고, 엄마표 영어에 대한 열정으로도 해결이 안 되더니 그저 책 읽고 내 마음을 글로 적으니 흘러간다. 흘려보내고 이 밤 잠들 수 있겠다.
아, 내일은 기분 좋은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