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었으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수영을 열심히 다니고 배웠냐면 새까맣던 내 수영복이 낡고 해져 마치 야들야들한 방충망처럼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어느 날 빨래를 널다가 '쌀벌레가 묻었나' (갑자기 무슨 쌀벌레?) 순간 착각이 들 정도로 희고 작은 점들이 보여 나도 모르게 햇빛에 비춰보니 이것은 고무가 생명을 다해 고무이기를 포기한 얇디얇은 포가 되어있는 수영복. 아차차 _ 수영을 향한 내 열정과 노고가 이토록 숨길 수 없이 드러나고 있구나. 그래 자유형 두 바퀴 돌았으면 내 몫은 다 했다 싶게 수영복이 해져있었다.
처음엔 자신감도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쿠팡에서 수모, 수경, 귀마개, 수영복, 수영 가방까지 한 세트로 판매하는 저렴이를 샀지만 또 그럴 수야 있나, 내가 누군가 뭐든 깔별로 사재끼는 내적 탐욕가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때가 되었으니 나도 새 수영복을 장만해야지.
그전에 늘 신경 쓰였던 와이존. 그래서 첫 수영복도 3부 수영복으로 넉넉하게 가려지고 부담이라고는 없는 검은색이었는데 초급반에서 바라본 다른 라인들엔 검은색 수영복이 거의 없다. 심지어 3부는커녕 2부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엉덩이도 반쯤 나와있고 장골릉은 물론 세상에나 눈 둘 곳도 마땅치 않은 섹시한 수영복도 거침없이 입고 다닌다. 색은 또 얼마나 화려한가. 패턴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그런데 그런 수영복들을 날마다 바꿔 입고 오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수영복만 바뀌나? 수모는 색색별, 수경도 깔별로 _ 런웨이 저리 가라다. 정말 저리 가라다. 샤워하며 수업 전에 물장구치면 하나둘씩 들어오는 사람들 모양새 구경에 재미가 쏠쏠할 정도니 수영장의 열기는 언제나 후끈거린다.
그런데 막상 저렇게 팬티 라인의 수영복을 사려니 남들은 다 비키니 왁싱을 하고 수영을 오는 건지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는데 나는 일정 부분의 체모가 신경이 쓰여 또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같은 반 초보반에선 드물게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오는 한 친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수영복 입을 때 거기는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아무렇지 않게 자기는 쪽집게로 뽑아요!라고 말했다. 으악 _ 그러고 보니 샤워할 때 조심스레 면도기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은 여자지만 거기를 대놓고 쳐다보기 민망하니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가며 빠른 스캔을 해보면 나처럼 신경 쓰는 사람도 몇 있긴 했지만 거길 자세히 볼 일도 보여줄 일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내 눈에만 거슬리지 뭐 사자 갈기도 아니고 허벅지 살을 못 모아 스치듯 걸어 얼른 물에 들어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드디어 새 수영복을 샀다. 여러 벌 샀다. 초록색에 블랙 패턴이 들어가 있는 쨍한 느낌의 수영복이랑, 노란색 꽃무늬 수영복이랑, 샛주황색에 찐파랑 라인이 들어간 수영복이랑 마치 성조기 같은 느낌의 블랙 수영복이랑 파도가 넘실대는 무늬가 독특한 청록색 수영복. 한 번에 다섯 개를 샀다. 이렇게 사고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장바구니에 크게 고민도 없이 이것저것 다 담아뒀다. 다시는 수영복에서 쌀벌레를 볼 일은 없을 거다라는 굳은 마음으로 수영복 다섯 개에 수모 두 개, 수경도 세 개나 샀다. 내 장바구니는 떳떳한데 딸아이가 새 수영복을 볼 때마다 또? 또? 또?라는 말과 표정을 반복하니 필요가 아니라 욕심이란걸, 사람이라면 욕심이 있어야 한다는 걸 어찌 설명할까 하다가 말문이 열리지 않아 다음엔 솔이꺼도 사줄게라는 말도 흐지부지 흐리면서 다음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기쁘고 즐겁다. 그리고 그 다섯 개의 수영복을 모두 개시한 지금 돌아보면 단 한 번의 스피드 족집게 (으악_) 모멘트가 있었고 나머지는 생각만큼 (?) 그렇지도 않아서 당당하게 잘 입고 다니고 있다. 무엇보다 수영장 가는 기쁨이 곱절은 더 커졌고 아마 알게 모르게 수영 실력도 분명 곱절만큼 늘었다고 본다. 수영복 입을 생각에 수업 빠질 생각을 안 하니 수영이 늘 수밖에.
내가 새 수영복을 입고 보니 수영장에서 졸린이니 천벌 언니니 하는 말들이 흉보는 말이 아니란 걸 받아들이게 된다. 수영을 하루 이틀 배울 것도 아니고! 수영이 뭐 마음만 먹으면 다 배워지는 것도 아니고! 지극한 노력과 정성과 열정과 재미와 깔깔의 수영복, 수모, 수경 장비빨이 갖춰져야 평포자도 안되고 접영도 해보는 거지 뭐.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라며 카드 할부를 슬그머니 생활비에서 야금야금 메꿔가고 있다.
덕분에 나도 물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