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솔이 생일을 이틀 앞두고 둘째가 생긴 걸 알았다. 그날 아침에 임신테스트기 두 줄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달려갈 때도 둘째의 기쁨보다는 솔이에게 형제, 자매가 생긴다는 사실이 더 기쁘고 벅찼다. 어린이집에서 그렇게 동생들을 이뻐한다는데, 놀이터에서 같이 놀고 있는 또래 친구들을 볼 때면 멍하니 바라보는 솔이가 떠올라 둘째의 존재가 더없이 반가웠다.
임신 사실을 남편에게 알린 것도 한 참 뒤, 솔이에게 알린 것도 더 한 참 뒤. 사실 배가 불러서 누가 봐도 임신이구나 싶을 때 솔이에게 동생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 추석 명절을 앞두고 너무 심한 입덧 탓에 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양가 어른들이 먼저 아시면 분명 말이 많이 나올 테고 그럼 솔이가 어리둥절할 텐데, 그전에 우리의 가족을 기쁨을 솔이에게 먼저 전하고 싶었다.
말하기 전에, 걱정이 많았다. 아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막상 동생이 생긴다고 했을 때, 질투나 시샘이나 스트레스를 받기 쉽다는 글을 많이 읽어 무엇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솔이는 솔이답게 반응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동생이 태어남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지날 때쯤 동생이 태어난다고 말한 뒤로는 매일 같이 '엄마 이제 겨울이야?' 묻기도 했고 표시도 안나는 내 아랫배에 뽀뽀를 하거나 도리도리 까꿍을 하며 동생을 기다렸다.
나는 그런 솔이가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이 무겁기도 했다. 솔이처럼 지기 싫어하고 관심받고 싶어 하고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온 아이가 무엇인가를 공평하게 나누며 사는 (어쩌면 약탈에 가까울지도 모를 삶을 산다는 게)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임신 사실을 양가에 알렸을 때 많이들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지만 특히나 많이 들었던 말을 '솔이 자꾸 안지 마라'였다. 남편은 외동아들인데,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동생이 뱃속에서 7개월쯤 됐을 때 시어머니가 지금의 내 남편을 안고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5층을 오르락내리락하다 그만 조산했고 그리고 안타깝게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 둘째 임신 소식을 들은 뒤로 줄곧 지금까지 (임신 5개월 차) 나만 보시면 말씀하신다. '솔이 자꾸 안고 그러지 마라'
솔이가 항상 내 옆에 있으니 솔이도 그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친정엄마는 첫딸을 나은 걸 만회할 기회라도 엿보는 사람처럼 성별을 언제 나오냐부터 시작해 온통 안부가 둘째 이야기뿐이니 솔이는 어떤지 몰라도 내가 괜히 심술이 나고 서운했다. 그래서 언젠가 모두들 이제 둘째 이야기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결국 남편한테만 큰소리를 내고 만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솔이는 한결같이 동생에 대한 기쁨과 설렘을 표현했다. 언제 겨울이 오는지, 애기가 태어나면 둥가 둥가를 해 줄 거다, 맘마를 먹여줄 거다, 이 장난감은 아기를 줄 거다, 내 배를 쓰다듬으며 '뚜뚜야 언니 목소리 들려?' 이렇게 태담까지 하는 솔이. 그런 솔이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며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한참 조용한 솔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보통 솔이가 조용할 때는 혼자 옷을 갈아입거나 신발을 신어보거나 어려운 도전을 하며 집중할 때라 나는 기다리면 되는데, 그날 따라 너무 조용한 솔이가 걱정이 됐다. 그리고 내 곁에 다가온 솔이를 내려다본 순간, 나는 적잖이 놀랐다. 매직으로 온 집안 벽에 선을 그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렇게 돌다 보니 싱크대까지, 내가 있는 곳까지 빨간 매직 줄이 생기게 됐고 그때 나와 마주쳤다.
뭐, 아이들이 자라면서 벽에 낙서하는 일이야 다반사다. 솔이도 유리에, 거울에, 벽에 낙서를 많이 했던 아이다. 하지만 대체로 그것이 놀이임을 알 때, 그리고 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그리거나 아님 혼자 하더라도 꼭 '엄마 이거 뭐게?' 물으면서 그. 림. 을 그렸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없이, 나와의 상호작용도 없이 그냥 멍하게 매직만 손으로 뻗어 온 집안을 걸어 다니고 있는 솔이는 불길했다.
솔이와 나는 집에 돌아오면 항상 손을 먼저 씻는다. 아기 때는 내가 뽀독뽀독 씻겨주었지만 언제부턴가 혼자 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옆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다가 그 단계를 지나, 나는 거실 화장실에서 솔이는 안방 화장실에서 각자 손을 씻고 만나는 패턴이 생겼다. 분명 제대로 못 씻을 테지만 혼자 무언가를 해내고 나오는 솔이의 성취감 어린 모습을 보는 것도 좋은 듯 해 내버려 뒀다. 그랬더니 정말 야무지게 소매도 걷고 비누도 칠하고 잘 헹구고 걸린 수건으로 톡톡 닦고 나오기까지 했다. 그 수건을 항상 자기 눈높이에 있는 문걸이에 걸기까지. 참 야무진 아이다.
그런 솔이가 빨간 매직 선 일 이후, 손을 닦고 난 수건을 변기 속에 넣기 시작했다. 변기에는 휴지 말고는 넣었던 적이 없었고 변기의 용도가 무엇인지 많이 경험해보고 있는 가운데 솔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둘째에 대한 스트레스구나. 솔이도 모르게 느끼는 스트레스. 동생이 생기는 것, 언니 또는 누나가 되는 것,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 외에 누군가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스트레스. 그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뒤로 걷기. 일시적 퇴행.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마음이 아팠다. 가뜩이나 입덧 때문에 솔이를 남편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둘이서 놀아줄 때 앉아만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그러면서도 솔이의 씩씩하고 밝은 모습에 괜한 의지를 하며 지내왔는데. 솔이는 그냥 솔이로 보아야 함을 다시 깨닫는다. 어쩌면 아직 4살밖에 안된 꼬마 아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진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말만 번지르하게 할 뿐이지 아직도 아무거나 입에 갖다 대보는 아기인데 말이다. 솔이와 함께 다시 겨울나기를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