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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Nov 16. 2017

알아야 보인다

맹자에서 영화 '콜래트럴'까지





 최근 '콜래트럴(collateral, 2004)'이라는 영화를 안방극장에서 보았다. 2004년에 나온 영화를 이제야 본 이유를 굳이 변명하자만, 내가 극장을 쫓아다니며 영화를 찾아보는 적극적 수용자가 아니라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나온 영화를 시청하는 피동적 관객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학생 때부터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 등에서 틀어주는 작품들을 주로 보던 습관이 이런 경향을 방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영화가 꽤 작품성을 갖추고  있다면 진흙 속에서 꺼낸 진주가 된다.  


의뢰를 받고 사람들을 죽이러 다니는 '빈센트'에게 '맥스'가 묻는다. 


"사람이 떨어져 죽었어요."

"르완다에서는 하루에 수 만 명이 죽어. 그런데 아무도 신경 안 쓰잖아."

"저는 르완다 사람을 몰라요."

"저 사람도 모르잖아."


빈센트의 총을 맞은 피해자가 아파트에서 택시 지붕 위로 떨어지자, 택시 기사 맥스는 혼비백산하지만 빈센트는 오히려 그에게 반문한다. 극 초반의 이 지점은 범죄 누아르를 순식간에 인생철학 영화로 바꿔버린다. 


맹자(孟子)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에는 제선왕에 얽힌 일화가 나온다. 하루는 신하가 제사에 올릴 소를 끌고 간다. 제선왕이 눈물을 흘리는 소를 보고 마음이 측은하여 '저 소를 양으로 바꾸도록 하라.'고 한다. 임금이 재물을 아끼려는 마음에 소보다 값싼 양으로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소가 불쌍해서? 그렇다면 양은 불쌍하지 않은가? 그러한 의문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見牛 未見羊) 


내 눈에 한 번 밟힌 소는 불쌍하지만, 어디서 끌려올지 모를 익명의 양은 가엾지 않다. 제선왕은 소를 직접 보았고, 이렇게 '본다'라는 행위로 관계를 맺은 소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들었으나 그가 직접 보지 않은 양은 인식의 범위 바깥에 있다.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은 설령 실재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 번이라도 안면을 트게 된 사람이 넘어질 때와 생판 모르는 사람이 넘어질 때 이를 목도하는 우리의 심정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신영복 선생님은 존재론과의 대비 속에  관계론을 중시하였는데, 대상과 대상이 서로 관계를 맺는데는 인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교과서에 나온 김춘수 시인의 '꽃'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그런 생각을 접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영화 한 편 보고 이렇게 인식과 관계론에 관한 썰을 길게 풀어놓는 이유는 최근에 봤던 기사 한 토막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20대 부부가 3살 배기 아이를 학대해 숨지게 했다'는 표제 아래 '20대 아빠와 새 엄마는 아이의 목에 개줄을 묶어 침대에 묶어놨다'는 내용이 있었다. 과거에도 이런 학대 사건은 있었고, 여전히 미래에도 있을 만한 흔한 사건사고의 하나다. 더구나 모든 개인들이 타자화된 복잡다단한 현대사회 속에서 말 그대로 '남의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기에 똑같은 사건을 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돌이 갓 지난 아들이 안아달라며 보챈다. 어느덧 아빠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아들을 통해 기사 속 아이의 이미지를 소환한다. 키는 한 95-96cm, 체중은 14-15kg 되었을까? 아니, 제대로 먹지 못 했다면 좀 덜 나갈지도 몰라. 표현조차 미숙하고 물리적 저항따위는 생각할 수 없는 연약한 살덩이. 무기력한 아이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감내했을 모진 시련. 2시간만 이유식이 늦어도, 걷다 넘어져도 온 세상 서럽게 울어대는 아들의 모습에서, 그 아이의 영혼 깊숙한 고통을 유추하고 어림 짐작해본다. 


수전 손택은 본인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여러 전쟁과 재앙들을 고통스럽게 들춰내면서 우리가 이미지로만 파악하는 현실과 '진짜' 현실의 차이를 드러낸다. 편안하게 강 건너에서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기보다 고통스러워도 직접 바라보라는 책임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콜래트럴'이 비록 그런 인류애적 비전까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나는 그 대사에서 분명 사람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를 읽었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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