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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Jun 16. 2019

순대국밥집

변화하는 세상에 변하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글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순대국밥집이 있다. 근처 가게들이 간판을 새로 다는 와중에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가게 운영이 잘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여기로 이사온 몇 년 동안 그 가게에 손님이 있는 모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끔씩 남편 분 또는 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분이 주인 아줌마와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 정도가 보일 뿐이었다.


왼쪽 편에 자리한 철공소는 허름한데다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가게였다. 그러다 어느 날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묵은 때를 벗기고 멋진 닭갈비집으로 변모시켰다.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적당한 빈티지 풍의 인테리어로 변모시켰고, 음식맛도 꽤 괜찮았는지 어느덧 줄을 서서 먹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오른 편에는 횟집이 있었다. 회 장사가 신통치 않았는지 어느 날부터 복숭아, 포도 같은 과일 상자를 문 옆에 쌓아놓고 팔기도 하다가 언젠가는 그마저도 치워버렸다. 모월 모일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고깃집을 열었다. 이 집 또한 맛이 괜찮았는지 금세 손님들로 붐볐다. 


양 옆에 나란히 위치했던 가게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공유했던 순대국밥집은 어느덧 홀로 남았다. 성북동 비둘기 마냥 인고의 시간을 노래하는 가게는 이제 홀로 되어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을 뿐이다. 


이름 모를 아주머니는 가끔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문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 그 얼굴에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묻어 있었다. 평범한 자영업자인 나는 그 의미를 알 것만도 같았다. 가게를 오픈하고 나서 몇 개월 이후 찾아온 경영상의 위기에 곰 쓸개를 핥듯이 쓰디쓴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여지없이 그 가게 앞을 지나간다. 하릴없이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주머니의 얼굴과 마주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민망함과 아련함이 점철된 정서에 빠져들며 그저 묵묵히 지나칠 뿐이다. 


가만히 보면 그 분의 모습에서 인디언의 모습이 겹쳐보이기도 한다. 백인들의 위협에 쫓겨 슬픈 운명을 예감하며 기약없는 먼 길을 떠나는 인디언 말이다. 무표정하지만 쓰디쓴 삶의 힘겨움이 주름마다 배어있다. 


한 번은 맛이 궁금하여 그 가게에 들어섰다. 주력메뉴인 순대국밥을 시켰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맛이라는 본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국밥은 뜨거웠지만 깊은 맛이 없었으며, 반찬으로 나온 장조림와 계란은 상당히 오래 묵은 느낌이 났다.


서글펐다. 단순힌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늦게 닫는 식의 선형적인 노력이 의미없음을 알아차려서 더 그랬다. 농경시대의 얼리버드(eary bird)정신은 이제 없다. 양적인 수고와 시간의 투입이 효과를 발휘했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몸이 부지런하기보다는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질적인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퀀텀 점프(quantum jump)는 기대하기 힘들다. 


시대가 바뀌고 개인에게 요구하는 능력의 기준도 달라졌음을 알지만 아쉬움은 있다. 그 분에게 그러한 질적인 전환을 바랄 수 있는가? 이것은 폐지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핀테크(fintech)를 잘해보라는 조언마냥 허황하게 들린다. 


나 같은 문약서생에게 그 분의 상황을 바꿔드릴 만한 힘은 없다. 다만 평소 느낀 바를 이렇게나마 휘갈겨써서 마음으로라도 배설할 뿐이다. 오늘도 내일도 집에 가는 길에는 순대국밥집 앞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여지없이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들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또 지나갈 것이다.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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