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 다른 관점
“우리,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 말자. 있으면 감사한 거고.”
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 늦은 오후까지도 조기 퇴근 소식이 들리지 않자 불만을 드러낸 팀원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은근히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 내외부 경영환경이 좋지 않아 종무식 없이 조용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분위기였다. 옆자리 동료가 의아하다는 듯 말한다.
“같이 점심도 안 먹고 이대로 끝나는 건가요?”
점심 식사는커녕, 단체 메시지방의 인사조차 사라진 연말의 사무실은 그 어느 겨울보다 건조하고 차가웠다.
“여러분, 우리 모두 힘든 한 해였습니다. 그래도 곁에서 함께 애써줘 고맙습니다. 내일은 집에서 쉬며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더 나아질 새해에 뵙겠습니다.”
마치 대표인 양 이렇게 말하자, 직원이 웃으며 답한다.
“그런 대표님이라면 진짜 회사 다닐 맛 나겠어요!”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감사한 마음을 나누는 사무실과,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하는 사무실. 과연 어느 쪽의 미래가 더 따뜻하고 밝을까.
사실 대부분의 선한 직원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줄 여건이 안 된다면,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면 충분한 마무리가 될 수도 있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물음은 아닐 것이다.
이른 아침, 운전 중 벌어진 일이었다.
대로변에 잠시 차를 세웠다가 출발하기 위해 점멸등을 켜고, 후사경을 확인한 뒤 조심스레 좌측으로 핸들을 돌리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순간, 둔탁하게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고인가?’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 차 앞에 다른 차량이 멈춰 선 것을 보고 곧 접촉사고였음을 깨달았다. 좌측 후사경이 반대 방향으로 접혀 있는 것을 보니, 후사경끼리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우회전을 하려고 빠르게 차선을 변경하던 차량과, 사각지대로 인해 미처 보지 못한 채 출발하려던 내 차량이, 찰나의 교차점에서 맞부딪친 것이다. 먼저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렸다. 사이드미러를 잡고 살짝 힘을 주니 다행히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완충장치 덕분에 파손까지는 가지 않은 듯했다. 앞선 차량은 비상등을 켠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차로 다가가, 아직 열리지 않은 차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곧 중년의,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이 내렸다.
“제 차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냥 가셔도 됩니다.”
우선 급한 출근길에 소모적인 언쟁으로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겠다는 판단이었다. 두 차량 모두 눈에 띄는 손상은 없어 보였고,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상대 운전자는 내 차를 한 번, 자신의 차 오른편을 한 번 살펴보더니, “제 차도 괜찮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런데 우리 둘 다 많이 놀랐죠? 앞으로는 서로 더 조심하면 좋겠어요.”
살짝 웃으며 건넨 이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각자 차에 올라 비상등을 켠 채 인사를 나누고, 사건의 장소로부터 빠르게 멀어졌다.
회사로 향하는 동안에도, 방금 일어난 그 장면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바로, 그 사람이 보여준 ‘신사적인 대처’ 때문이었다.
여러 대인 관계의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나는 잘못이 없다’는 전제를 먼저 두고 반응한다. 실제로 잘못이 없지 않더라도, 그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상대에게 사과부터 요구하곤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지나친 방어기제는 어쩌면 여유를 잃어버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생긴 일종의 버릇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료가 나를 철저히 보호하려는 집착 끝에, 경계선에 있는 업무에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사실 모두가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나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며 동료나 조직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이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번 경우에도, 나름대로는 배려라고 생각하며 건넨 첫마디는 “제 차는 괜찮아요, 그냥 가셔도 됩니다”였다. 하지만 사고 직후 차에서 내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했던 말은 안부였을 것이다. 잘잘못은 그 다음에 따져도 될 일이었다.
불쾌할 수도 있었던 월요일 아침의 사건이 훈훈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신사적인 운전자의 ‘헤아림’과 ‘배려’ 덕분이었다. 그런 멋진 신사가 되려면, 그때 내가 했어야 할 첫마디는,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다.
Manners, Maketh, Man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 영화, 킹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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