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수술’이란 것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프지 않으면 할 일 없고,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를, 치유를 위한 수술이었다. 살아오며 처음 겪는 일이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준비 과정에서 병원을 다니며 수술 부위가 머리 쪽이라 당일 머리를 일부 깎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는 평소답지 않게 머리를 기르며 스타일에 변화를 주던 중이었기에,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잠시 멈칫했다. 수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면 당연히 따라야겠지만, 잠시나마 머리를 자르지 않고 수술할 수는 없을까 생각한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수술 몇 시간 전, 병원에서 안내한 대로 이발을 했다. 간호사는 병원 지하에 있는 이발소로 가면, 수술 부위를 말하기만 해도 잘 알아서 해줄 거라고 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지하의 이발소는 말 그대로 ‘이발소’였다. 현대식 병원 건물의 지하에 왜 ‘헤어살롱’이 아닌 클래식한 감성의 이발소가 자리하고 있는지, 막상 들러보니 이해가 갔다. 이발사 아저씨의 손은 빠르고 능숙했다. 머리 부위 수술 환자를 많이 상대해야 하니, 가위보다 면도날을 더 능란하게 다루는 이발사가 이 역할에 더 적합해 보였다.
가운을 입었다는 점, 병원에서 일한다는 점, 그리고 같은 ‘사(士)’로 끝나는 직업이라는 점 외에도, 의사와 이발사는 닮은 점이 있었다. 누군가가 건강과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의사는 메스를 들고, 이발사는 면도날을 든다.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이발사 아저씨가 물었다.
“어디 수술하세요?”
부위를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어느 세대의 유물처럼 보였지만, 이발에 최적화된 클래식한 의자였다. 자리에 앉자 목에 수건을 두르고, 수술 부위 주변의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어 전동 면도기, 이른바 ‘바리깡’을 꺼내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가차 없이 밀어내기 시작했다. 면도 거품을 바른 뒤 면도날을 능숙하게 이리저리 돌리며, 머리카락 자국도 남지 않도록 정갈하게 마무리했다. ‘머리는 또 자라게 마련’이라는 위로를 할 틈도 없이, 이발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윗머리로 가리니 티도 안 나네. 수술 잘 받으시고, 얼른 쾌차하세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만 대해줘도 충분했을 텐데, 그렇게 던진 위로의 한마디에 어색하고 염려되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겪었을까. 얼마나 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을 만났을까. 얼마나 많은 걱정 어린 표정들을 마주했을까. 그리 밝지도, 넓지도 않은 병원 지하의 이발소에서, 이발사로 일하며 딱 한 번 만날 가능성이 큰 고객들을 위해, 수술실의 의사가 원할 만큼의 머리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온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좋은 일로 들를 리 없는 이들의 어지러운 마음까지도 어루만져 주던 그 한마디는, 굶주림 속에 손에 쥐어진 적당한 쿠션감의 팥빵 같았고, 추운 날 시린 손을 녹이기 위해 편의점에서 꺼내든 따뜻한 베지밀 같았다.
그렇게 머리카락 한 움큼 정도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수술 준비실로 향하며, 문득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대체로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에도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존중과 배려의 태도로 훌륭히 해내는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반대로, 쉬이 잊히는 기억은 ‘다시는 볼 일 없는 사이’라는 관계적 특성을 철저히 이용했던 이들과의 일이었다.
기억이 흐릿해질지언정, 따뜻했던 순간이 더 많았고, 함께였던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사이일지라도, 온기 어린 빛의 흔적을 남기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과정 어딘가엔, 마지막 인연일지도 모를 병원의 이발사 아저씨도 있었고, 이국의 골목에서 조용히 음악을 틀어주던 카페 사장님도 있었고, 자주 마주치지 않았어도 끝내 서로의 무운을 빌어준 고마운 동료들도 있었다.
있다가 사라지는 복지보다, 그래도 남겨질 선한 마음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혹은 문화에 대한 두서없는 생각이었다.
선심은 쓰는 것이 아니라, 갖고, 키우고, 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