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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맺는 일

경향잡지 2025년 4월, '맺는 이야기, 2'

by 케니스트리

'맺는 이야기, 1'에서 이어지는 글 입니다.




잘 맺는 일


역대급 폭설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왠지 걷고 싶었습니다. 도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탄천을 따라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반대편에 두고 온 추억이 너무 빠르게 멀어지는 것이 아쉬워서였을까요, 쏟아지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었습니다. 곧 눈이 길의 경계를 지웠고, 세상은 흐릿하게 변했습니다. 사방은 고요했습니다. 마치 낯선 설원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하얀 어둠 속에서도 남동쪽 성당의 십자가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와 같이 '이 길이 옳아'라고 말하는 듯했고, 자애로운 빛으로 철 모르고 피어난 믿음의 꽃을 비추었습니다. 아득한 하늘에서 퍼붓듯 내리는 눈발 사이에서, 예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성호경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눈길을 걸으며, 그리운 이에게 써 오던 편지를 생각했습니다. 잊기 싫어 이어간 미련의 흔적인데, 이제 더는 읽는 이가 없습니다. 쓰는 이가 곧 작가이자 독자인 셈입니다. 그 편지도 이제는 마지막 페이지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끝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도, 이야기를 온전히 맺을 자신이 아직 없기는 합니다. 그러니 끝나서 아쉬울 일 없고, 언제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봄날 맑은 샘과 같은 성경을 더 가까이하려 합니다.


루카 복음서는 서두에서 독자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Theophilus)’라고 불렀습니다. 또, 주임 신부님은 강론에서, "성경이 살아 숨 쉴 때는 믿음 있는 이가 읽고 그 의미를 바로 새길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잘 맺는 일은, 언제나 우리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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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하늘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면 폭우고, 눈이 오면 폭설이었으니까요. 겨울 끝자락과 봄의 초입이 맞닿은 3월, 창밖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중, 회사 동료가 문득 물었습니다.


"5월 부처님 오신 날이 월요일이네요. 꿀이다. 그런데 불교에는 부처님 생일이 있고, 기독교에는 하느님 생일이 있는데, 천주교 기념일은 왜 없어요?"


어떤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동료는 분명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 님을 섬기는 종교’라고 오해했을 것입니다. 저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예수님 탄생일이고, 사실 하느님께는 생일이 따로 없어요. 천주교가 성모님을 섬긴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모님은 신과 사람을 잇는 매개일 뿐, 섬김의 대상은 아니에요. 천주교도, 기독교도 모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종교예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동료는 몇 가지를 더 물었습니다. 아는 대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요약은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탄생 이후의 계약인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천주교와 개신교를 믿는 이들 모두 그리스도교인이라는 것.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고백한다는 것 등입니다.


“시간 정말 빠르네요. 처음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시작한다고 하셨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저한테 개념을 설명해 주시네요.”


돌이켜보니, 평안을 찾아 성당에 들어섰던 날부터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카페 드 바이블>이라는 제목처럼 신앙을 마치 커피 한 잔 나누듯 가볍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접할수록 성경 여백의 흰빛은 너무 눈부셨고, 글의 흑색은 가늠할 수 없게 아득했습니다. 다만 저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것을 바라보거나 이제 막 시작의 걸음을 뗀 분들은 공감을, 이미 오래 걸어와 믿음이 깊은 분들은 기특한 마음으로 보아주신다면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일 거라고 믿고 썼습니다.


이 주제로 처음 쓴 글이 생각납니다. 스스로의 경험을 마중물 삼아 끌어올린 이야기는, 우리 민족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주제로 한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이 글은 제게 애틋합니다. 글을 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집자님으로부터 <경향잡지>에 네 편의 칼럼을 연재할 기회를 얻었고, 그로부터 많은 좋은 교우분들을 만나 교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인연이자 독자분이 보내준, 너덜너덜해진 책장 사진은 그 어떤 반짝이는 성물보다 더 빛나는 선물이었습니다.


더 깊이 걸어 들어갈 성경 속 다음 여행을 기다리며, 지난여름부터 이어온 이야기를 일단락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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