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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호출

가시를 품은 장미 #5 - 검사 후

by 케니스트리

'아무렇지도 않은 하루였다.


너른 들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 그 아래 모여 이리저리 뛰노는 아이들. 반려견들. 아, 그래, 우리 강아지. 오래 보지 못했지. 왠지 이전보다 더 어려 보이는 우리, 오랜 식구인 생명, 생명체. 동산 옆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 탄 커플이 보이네. 연인일까? 부부라기엔 조금 어려 보이고. 참 좋아 보인다. 맞다, 자주 이곳저곳 함께 다녔던 나의 자전거. 새 주인을 만난 그 녀석은 잘 달리고 있으려나? 비 오는 날 자전거 타고 나가 홀딱 젖고 돌아왔어도, 편안한 잠자리에서 또 다른 여행을 꿈꾸던 그런 일상. 걷고 싶을 때 걷고, 잠들고 싶을 때 스르르 눈이 감겨 어느새 꿈결을 헤매던 나의 휴일, 오후 이맘때.'


"환자분, 검사 잘 끝났고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세요."


아, 잠시 꿈이었구나—하며, 커다랗고 시끄러운 MRI 검사 기계 안에서 눈을 떴다. 10년도 더 전부터, 암 치료가 끝난 시점부터 정기적으로 찍는, 세상에서 가장 적나라한 셀(cell)카 촬영 시간이다.


방사선과 항암을 지나 이제 정기적으로 받는, 두 해에 한 번의 일. 수많은 검사에서, 아직 어떤 나쁜 것도 내 몸에서 다시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간혹 코피 나 두통 같은 부정한 증상을 맞닥뜨릴 때 훅 불어오는, 데이모스(Deimos)의 두려운 입김은 피할 수 없다.


그래도 해를 거듭할수록, '제발'이 '괜찮을 거야'가 되고, '긴장되는 과정'이 '일상의 휴일'로 변하며, 시끄러운 검사 기계 속 공명음에도 그리운 일상을 꿈꿀 수 있는 익숙함에 이르렀다. 장하다, 여기까지 왔구나. 자랑은 아니지만, 감사할 일은 맞다.




병든 땅에도 잡초는 자란다


검사실을 나와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고맙게도, 나의 이번 정기 검사에는 동행이 있다. 내가 검사실에서 나온 걸 알아채지 못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무어라 기도하고 있었다. 묵주기도. 기도를 방해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아야 하지만, 달콤한 꿈에서 깬 현실을 달콤하게 만드는 그녀를, 이 길로 초대하는 일도 내 몫이다.


"로사!" 이름을 불렀다. 이 장면에서 그녀의 이름은, '고마워요. 나 검사 잘 마쳤어요'란 의미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함께 미사를 마치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로사가 말했다. 곧 있을 검사는, 마지막 검사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은 이후 반년 만에 다시 하는 추적 검사였다. 아직까지, 재발을 겪지 않은 나는 별일 없을 거라며 로사를 안심시켰다.


"별일 없겠죠. 검사 마치고 뭐 해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검사, 병원, 조영제를 맞는 주사가 조금 힘들다는 등의, 여러 이질적인 주제를 덜어낸 우리의 대화는 미련보단 미래를 향했다.


"머리 많이 자랐네요? 어떻게 기르고 싶어요?"


새삼, 처음 만났을 때 보다 길어진 로사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여자에게 평균 이하로 짧은 머리지만, 확실히 이전보다는 긴 느낌.


"일단 조금 더 길러 보고, 다듬으려고요. 음, 어깨까지는 길러볼까 해요. 긴 머리 좋아해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찾아낸 단서로 조금씩, 그리고 더 넓게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다.


"머리가 빠질 때가 좀 힘들었어요. 항암 부작용 중에서, 사실 머리가 빠지는 건 불편한 거지 아픈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머리가 많이 빠질 때 너무 불편하니까 아얘 싹 밀었었어요. 그러니까 왠지 더 아픈 사람 같아진 거예요. 실제로 사람들도 더 측은하게 보고요."


나도 그랬다. 머리가 빠지는 건 일시적인 부작용이다. 항암을 마치면, 오래지 않아 다시 자라게 된다. 불편한 것은, 떨어지는 머리카락뿐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부담됐다.


항암을 마치고, 어느새 미용실에서 다듬어야 할 정도까지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을 때 분명 우리 가족은 마치 완치한 것 같은 들뜨고 기쁜 분위기였다. 진실은, 머리카락이 있고 없고는 암세포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길어진 머리가 곧 완전한 회복처럼 기쁜 것도 분명했가.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게 됐을지도.


'로사가 다시 행복한 날들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고, 또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믿더라도, 기도는 진심을 담아 했다.


로사는 병원에 혼자 간다고 했다. 어차피 검사 자체는 익숙해서,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오직 부담스러운 것은 팔에 맞아야 하는 조영제 주사와, 혈액 검사라고 했다.


"제가 혈관이 너무 약해요. 간호사 선생님도 팔에서 피 뽑는데 자주 애를 먹어요. 그래서 주로 혈관이 선명한 손등에 바늘을 찌르는데, 그게 너무 아파요."


이런 어려움도 있구나. 새삼 혈관이 건강해서 그간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게 감사했다.


의외의 호출


"어때요? 검사는, 잘 끝났나요?"


"네 괜찮았어요. 주사 맞을 때는 아팠지만요."


검사가 끝날 무렵 한 전화 통화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밝게 느껴졌다. 내가 아팠을 때 다녔던 병원, 그 어디쯤에 그녀가 있다. 비록 진료 과는 달라도, 몇 층이라고 말하면 그 주위의 분위기가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 것 같은, 익숙함.


"아, 잠시만요. 지금 간호사님께 연락이 와서요."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간호사 연락을 받는다며 전화를 끊은 로사. 이유 모를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전화 통화, 그리고 통화 종료.


회사에서 일하던 중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이라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전, 아직 점심식사 전이었고, 사무실은 무척 조용했다.


'별 일 아닐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 내 감정을 속이고 있었다. 크게 아파본 다음 난, 병원과 연관된 그 소식도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다. 대범한 척 살아가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 스스로보다 누군가의, 건강의 이상 신호, 또는 위화감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그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혈액내과 선생님이 저를 불렀다가, 잠시 영상의학과 선생님께 확인할 게 있어서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 준다고 하셔서, 지금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왠지 모를 위화감이 다시 들었다. 지나치게 걱정하면 대체로 안전했던 일상 때문일까, 그녀의 메시지를 보고 다시 걱정이 앞섰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 선생님이 뭐라셔요?"


"잘 모르겠어요. 보통 검사 결과가 일주일은 지나서 나왔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바로 좀 보자고 하셨어요. 얼핏 듣기로는, 영상의학과 선생님과 작은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 같은데..."


"그렇구나. 알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따가 연락 줘요."


전화를 끊고, 다시 일을 하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지만, 다시 손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키보드 자판을 누를 정신도, 힘도 잠시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지? 응,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선생님이 꼼꼼해서, 그래도 다행이야'


안도할 일일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응. 별 일 아닐 거야.


곧 점심시간이 되어 밥을 먹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 평범한 시간이 이어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그 모든 시간에 사실 나의 마음은 그 병실 앞에 머물러 있었다. 분주한 간호사들. 차례를 기다려 들어가는 환자들,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들. 나름의 질서, 나름의 기대, 나름의 걱정, 나름대로의, 희망. 건강한 이, 아픈 이, 마음이 더 아픈 이들이 오가는 복도가 그려졌다. 적막한 화려함 한가운데, 초조하게 간호사의 부름을 기다릴, 로사가 보였다.


로사와의 마지막 대화 후 한 시간 여가 지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마침내 전화가 왔다. 영상의학과에서는 1차 소견상 별 다른 이상징후를 보지 못했는데, 혈액내과 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고. 설정을 달리 하자 작은 음영이 보였다고,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선생님이 최대한 빨리 MRI를 찍자고 하세요. 머리 쪽에 무언가 보인다고. 이게 무슨 일일까요? 나 너무 무서워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린 사이,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주워 담아 이야기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로사. 별 일 아닐 거예요. 미리 걱정하지 말자고요. 검사를 조금 더 해 보자, 확실히 하자는 의미일 거예요. 잠시 다른 생각 말고, 우선 집에 조심히 잘 돌아가요."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맞닥뜨릴지 모를 현실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런 뻔한 말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나의 무력함이 원망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아무 죄도 없는 벽을, 손바닥으로 쾅하고 내리쳤다. 전화 통화를 위해 마련된 공간엔, 눈을 질끈 감은 채 뜨지 못한 나와,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 소리와, 어두컴컴한 현실과, 얼얼한 손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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