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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가시를 품은 장미 #6 - 림프종 뇌(CNS) 전이 재발

by 케니스트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 5, 13~16




#6-1

미각 상실


소금을, 어느 날부터 아무리 찍어 먹어도 짠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라진 것은 미각인데, 세상의 모든 빛도 함께 사라진 듯했다. 맛도 공간도, 뿌옇고 탁하고 흐릿했다. 무기력함마저 고통이라면, 내가 지닌 감각은 그 하나뿐이었다.


맛을 느낄 수 없으니 식욕도 사라졌다. 맛을 상상으로만 그려내야 했다. 그림실력이 부족한 난 즐거움의 절반쯤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았다. 위안을 찾고 싶어 TV를 켰다. 광고도, 예능도, 드라마도 온통 먹는 이야기뿐이었다. 그 장면들은 메마른 나에게 그저 더운 부채질처럼 느껴졌다.


한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암을 내 몸의 일부로 인정하고, 너무 들여다보지 말라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따르고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희망이 다시 불붙을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입맛이 없고 고통만 남은 감각의 황무지에서 이토록 존재감을 드러낸 존재를 어떻게 품고, 잊고, 몸의 일부라 여길 수 있을까. 나는 매일 무기력함에 기대어 누울 뿐이었다.


항암을 마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소금의 맛을 느꼈다. 항암 이전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짠맛이었다. 치료가 끝난 것도 아닌데, 그저 부작용 한둘이 사라진 것은 어둠 속에 나타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뭘 먹어도 약 냄새 같고, 다 쓰기만 하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식욕은 줄지 않았어요. 오히려 뭘 자꾸 찾게 되고, 운동도 하게 되고요.”


로사는 첫 항암 중에 미각 상실을 겪었다. 미각 상실은 입 안 점막이 손상되면 생기는 비교적 흔한 항암 부작용이었다. 대개는 일시적이다. 하지만 그 사이, 식욕 저하와 영양 결핍은 의지를 흔든다.


늘 맛집을 찾는 삶은 아니었어도, 맛을 잃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즐거움, 그것은 일상의 행복이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식사가 빠지지 않고, 함께 밥 먹는 사람들을 '식구'라 부르며, 주일에 성당에서는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며 '함께 믿음'의 증거로 성찬의 예를 올린다. 혀는 분명 관계에 도움을 주는 듯하다. 말할 때는 신중히, 음식을 먹을 때는 충실히 일할 때 그렇다.


“전 방사선 치료까지 함께 받았어요. 그래서 침샘이 자극되면서 미각이 완전히 사라진 적이 있었어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어요. 그때 알았어요. 제가 그렇게 맛에 민감하지도 않고, 입이 짧은 편이었는데, 사실 음식을 먹는다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는 걸요.”


공감의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로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부를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고 먹을 수 있을까요? 정말 힘들어요. 맨밥에, 양념도 없이 두부, 풀, 고기만 먹는 느낌. 소화도 안 되고, 목도 예민해져서 잘 삼키지 못하니까 영양액만 마시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살이 쭉 빠지더라고요.”


안 먹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잠만 잤다. 작았던 옷도 헐렁해졌고, 거울에 비친 나는 더 아파 보였다. 나는 그냥 암 환자였지만, 그 모습은 마치 삶을 포기하고 방치된 사람 같았다. 그 변화를 지켜본 부모님과 가족들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로사의 하루는 그때의 나와 달랐다.


“밥도 잘 챙겨 먹고, 하루에 한두 바퀴씩 호수공원 돌며 운동했어요. 규칙적으로 살다 보니, 오히려 건강해졌단 생각도 들더라고요. 혈액암 환자 중엔 체중이 는 사람도 있대요. 약물 부작용 중 하나가 부종이라던데, 저는 오히려 근육량이 는 기분이었어요.”


의지는 때로 모든 어려움을 이긴다. 하지만 어려움은 그 의지를 숨게도, 사라지게도 만든다. 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야 의지가 이길 수도 있겠지만, 그 싸움조차 포기하면 몸은 암에게 가장 좋은 터전이 된다.


로사는 자신을 흔들고, 일으켜 세우며 ‘나태’라는 암의 식량을 치웠다.


#6-2

혈액암 뇌(CNS) 전이 재발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된 것이었을까? 혈액내과 선생님은 지난 PET-CT 검사에서 두 개의 작은 음영을 의심했다. 그리고 곧바로 MRI 검사 일정을 잡았다. 음영의 정체를 확인하는, 첫 번째 과정.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시작되는 시간.


"극히 드물기는 한데, 지금은 CNS 침범 재발이 의심돼요. 검사를 우선 하고 재발이 맞다면 따로 치료 계획을 세워야죠"


제발. 염증이길. 포도당의 흔적이길. 유혹에 약해진 우리에게 하는 신의 가벼운 경고이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길.


며칠 뒤 급하게 한 첫 번째 MRI 검사에 동행했다. 주사를 맞기 전 피검사를 하기 위한 채혈을 하면서, 한 번에 하지 못해 여러 번 혈관을 찾아 로사의 손등에 두꺼운 바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내 살이 찢기는 것 같은 상상 속 고통. 로사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MRI 검사를 마칠 때가 되어 조심스럽게 검사 대기실에 들어가 보았다. 마침 검사를 마친 로사가 의자에 앉아 휴식하고 있었다. MRI는 힘든 검사라, 끝나면 걸어 나오기도 힘들어 검사실 앞에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검사는 잘했어요? 시끄러웠죠?"


"머리 쪽이라서 조금 힘이 드네요. 그래도 시간은 금방 간 것 같아요."


그날에는 동행하며, '재발'이니 '항암'이니 하는, 어쩔 수 없는 신이 정한 길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일상의 주제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의 전부였다.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병원에서 전화로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고 전했다. 구체적인 것들은 외래 진료에서 알아봐야 한다고. 조직검사는 암의 종류를 알아보는 것으로, 이 계획은 사실상 CNS 전이 재발의 확정이다.


“조직검사를 해야 한대요. 림프종의 뇌 침범 재발로 보인다고. 긴 바늘을 넣어 조직을 채취할 거래요. 좀 더 정밀한 영상검사도 하기로 했어요.”


단 몇 줄의 메시지였지만, 마치 목소리처럼 떨림이 느껴졌다. 아마도 핸드폰을 든 내 손의 떨림이거나, 불안한 심장의 파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리와 정의의 빛과, 부패와 부정에 맞선 소금으로, 이 땅에 침범한 온갖 불운과 불행을 이길 지혜와 힘을 주소서'


마음속 기도는 오래전, 암흑의 터널을 지나온 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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