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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06. 2020

국가부도 사태 속에 치른
대통령 선거

1997년 12월 18일 실시_제15 대 대통령 선거

"정치가는 스스로 정치적 포부나 신념에 입각해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고 

그 신념의 구현을 위해 투쟁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 국민에 책임을 져야 한다."

 - 막스 베버  Max Weber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국가부도라는 유래를 찾아볼 수 국가비상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아울러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선거로 실시된  세 번째 선거였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는 모두 7명이었으나 한나라당(신한국당과 민주당의 신설합당)의 이회창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자유민주연합과 후보 단일화)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3자 대결구도였습니다. 

성공한 DJP 연합


선거과정에서 핵심 쟁점은 1992년 대선자금 문제, 한보철강 부도로 드러난 대통령 아들 김현철 비리사건,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구제 금융 신청 문제 등이었습니다.  이런 정치경제적 쟁점 이외에도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은 선거전에서 최대 이슈로 부각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선거 결과, 김대중 후보가 1,032만 표를 얻어, 993만 표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1.6% 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역대 선거 사상 두 번째로 근소한 표차의 당선이었고 492만 표를 획득한 이인제 후보가 여권 성향 유권자의 표를 분산시키지 않았더라면 가능하지 못했을 터였습니다. 

15대 대선 주요 후보자 선거벽보


이렇게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 후보인 김대중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우리 선거사의 큰 획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도 천문학적 정치자금이 소요된 지독한 금권선거였으며 고질적인 지역분할 구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강원과 영남권에서 주로 표를 획득했고 김대중 후보는 수도권 충청권 호남권에서 몰표를 얻어 지역주의 투표행태가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IMF라는 먹장구름 속에서

이인제 후보의 영남표 분산이 없었더라면 김대중의 당선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김대중과 김종필의 이른바 'DJP 연합'이 없었다면 역시 김대중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수구 보수 세력이자 유신 잔당으로 평가받는 김종필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행동반경에서 여러 제약이 따랐습니다. 먼저, 김종필을 국정의 동반자로, 총리로 임명해야 했고 여러 개혁 정책을 원활히 펼칠 수 없었습니다. 또한 IMF 구제금융 신청과 국가부도 사태로 인해 경제적 주권을 뺏긴 상태에서 외국자본과 외국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정책의 기본 철학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던 터라, 전력, 통신, 철강 등 국가 주요 기간산업과 금융기관을 대거 민영화화여 외국자본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쉽게 열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국가부도 사태에서 신속히 벗어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주요 핵심 산업이 외국 투기자본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고 대량실업과 극단적 양극화에 대해서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IMF 국가부도 사태 속에 치러진 15대 대선



15대 대선 상황을 생각하며 볼만한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4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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