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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Jun 14. 2024

민희진은 '쿠션어'를 쓰지 않는다

괴물은 누구일까 _05

여성이 분명하게 의사표현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를 나는,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이 ‘충분히 암시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요청들’을 쌓지 않기를 바란다."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쿠션어(Cushion어)라는 게 있죠.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좀더 부드럽게 의사표현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을 의미하죠. 예를 들어,  ‘괜찮으시다면’, ‘실례지만', '죄송하지만', '바쁘시겠지만' 등등이 이런 쿠션어라고 해요. 직접적인 의사표현에 앞서 듣는 상대방의 기분을 덜 상하게 하도록 푹신푹신한 쿠션을 깔아준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신조어예요. 분명 적당한 쿠션어는 잘 활용하면 직장이나 사회에서 원활한 의사소통과 대인관계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여자가 부드러운 맛이 있어야 한다,"며 난데 없이 맛타령을 하거나,  "여자는 말을 이쁘게 해야한다." 며 쿠션어를 여성들에게만 요구하기도 하죠. 또 이런 압박을 받는 여성들이 쿠션어를 '애교와 아양을 떨며 말하기'로 오인하면 많은 부작용이 생기죠. 사실, 직장 생활에서 많은 여성들이, 특히 사회 초년생 직장 여성들이 쿠션어를 이렇게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상황과 내용에 적합한 쿠션어가 아니라 지나치게 혀를 짧게 발음하며, 몸을 비비꼬며, 맥락없이 헤헤거리며 말하는 것은 켤코 명확한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사 어찌어찌하여 의사가 전달되었다 해도 상대방 (특히 남성일 경우)의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쿠션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여자어' 혹은 '여성어'라는 단어도 있어요. 이는 남자와 여자는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표현 방법이나 의미하는 바가 다른 경우가 있다는 뜻이죠. 특히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남성에 비해 여성들은 자신들의 '진심' 혹은 '속마음'을 에둘러 표현한다는 의미로 쓰여요. 예를 들어, 여성이 쇼윈도에 진열된 물건을 보고 "저거 정말 예쁘다”라고 말했다면, 이는 "저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여성의 이런 말에 예쁘다고 공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갖고 싶으면 사줄까?"라고 물어보거나, 어떤 것인지 기억해 두었다가 선물을 해주는 남성이야말로 이른바 '여자어'를 잘 이해하는 남성이라는 거죠. 이 '여자어'라는 표현에는 '여성들은 자신의 의사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다'는 편견이 숨어 있지  않던가요?.또 '여성은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며, 표현하더라도 매우 완곡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일종의 사회적 강요가 숨어 있다고 생각해요.  


'태초의  간식'이 있던 그날 서무 면전에서 과도한  간식 타령, 지나친 간식 관련 농담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인지하지 못한 직원은  비단 그  '사발면 K 계장'만은 아니었겠죠. 그러나 '지나친 간식 비교를 삼가 달라'는 P의 문제제기에 다른 직원들은 뒤늦게라도 공감은 아니더라도 문제점은 인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는 다소 미안해하면서 간식 관련한 과도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유독 P의 메일에 공격적인 답장을 보내신 그 '사발면 계장'만은 달랐습니다. 이후로도 P에게 오히려 당당하게, 마치 카페에서 커피 주문하듯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를 꼭 집어 "루카스9 라테요."라며 퉁명스러운 쪽지를 보내기 일쑤였죠. 그리고 그날 이후 그 '사발면 계장'은 사사건건 P 의견에 반대하고 많은 일에서 반감과 불만을 드러냈죠.


  

무례할 수 있는 '간식 타령'을 자제해 달라는 P의 메일을 그 '사발면 계장'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아마 여러 가지일 겁니다. 상하 직원 간 직급차이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권위의식,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문화에 대한 구태의연한 집착 등 여러 요인이  있겠죠.  그분이 보낸 공격적인 메일을 보면, 자신들의 무례함은 '농담'이란 한마디로 이해해 주길 바라며 오히려 정중하게 보낸 p의 메일을 무례하다고 공격하고 있죠. P가 보낸 메일은 자신의 의사를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전달하고 있을 뿐 무례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말이죠. 이분이 자신의 무례함과 비교해 전혀 무례해 보이지 않는 P의 메일에 이토록 반감을 갖은 이유를 저는 쿠션어와 관련지어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 '사발면 계장님'은 자신이 듣기 싫은, 혹은 듣기에 유쾌하지 않은 내용을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단호함을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이, 특히 여성이 보이는 것이 불쾌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그 '사발면 계장'은 지금까지 직장에서 자신의 의사를 단호하게 표현하는 직원(특히 여성 하급 직원)을 많이  접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자신들의 의견을 에둘러 말하거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암시하거나, 완곡한 쿠션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직원들만 만난 듯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 '용수철 J 주무관' 처럼 쿠션어와 애교를 분별하지 못하는 직원들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은 여성들은 '여자어'를 사용해야 하므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때에는 절대 직설적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나친 간식 비교를 삼가 달라는 P의 메일과 그 메일이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발면 계장'의  답장 메일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도대체 P의 메일 내용 중 어떤 부분이 '상당히 불쾌한지',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내용이 어디가 그토록 '무례'한 지, 왜 그 메일을 '분란'이라고 느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발면 계장남'이 말한 '불쾌'와 '무례함', 분란으로 느낄 만한 거친 감정 표현 같은 것은 P의 메일 어디에도 없었죠.


P는 메일에서, 이미 간식이 많이 구비되어 있는 현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혹여 더 필요한 품목이 있으면 편한 방법으로 말하면 구입하겠다고 정중히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메일을 받는  직원들이 무례하게 느낄까 봐 조심스레 말씀드린다며 웃음 이모티콘도 많이 구사하고 있고요. 예를 갖추어 완곡어법을 사용하긴 하지만 본인의 의사가 어떤 것인지는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도는 농담이겠지만 듣기에 따라선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하니 타 과와 간식 관련된 비교는 삼가 주시라'라고 말입니다. 


'사발면 계장님'이 P의 메일에 그토록 감정이 상하고, 무례하게 느껴지고, 불쾌했던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여성 직원을 본 적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그 '사발면 계장님'은 P의 이 단호한 의사표현  방식이 매우 낯설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모든 낯선 것은 대개 두려움과 불쾌함을 가져오지 않던가요? 그래서 그 '사발면 계장님'은 쿠션어와 여자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자기 의견을 말할 때 완곡어법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몸도 비비 꼬지 않고, 억지로 웃지도 않고,  단호하게 말하는 P와는 "앞으로 더 재밌게 웃으며 근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단정했던 것 아닐까요? 이제  이런 여성 직원 앞에서는 무례한 농담도  마음껏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겠죠,  황당하고 불합리한 의견을 마치 '좋은 생각'이라 우길 수도 없을 터이니 이제 분란만 생길 것이라 지레 짐작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만약 이 '사발면 계장님'이 쿠션어나 여자어, 완곡어법을  사용하지 않는 민희진 대표와 함께 일한다면 어떨까요?

언론  앞에서도  거친 표현을 주저없이 구사하고, 자신의 감정을 단호하다 못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민희진 대표와는  이  '사발면 계장님'은 아마 단 한순간도 "재밌게 웃으며 근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민희진 대표 또한 자신의 부서에서 서무 역할을 맡고 있는 여성 직원에게 그저 자신의 구미에 맞는 간식이나 잘 구비해 놓으라고 강요하는 '사발면 계장님'의  불쾌함과 황당함은 크게 개의치 않을 겁니다. 동료직원이 아니라 민희진 대표에게 그는 수많은 '개저씨'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그러므로, 비록 일터의 여성들이 각자의 일터에서 단지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는 이유로 공격받고, 분란 유발자로 매도당하지만,  일터의 여성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 수많은 '개저씨'들 앞에서 단호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우리는 통하니까, 저 사람은 똑똑하니까, 

내가 선의로 대하면 나를 선의로 대해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막무가내로 베풀고 실망하지 말자."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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