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누구일까 _07
누구나 누릴 수 없는 건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단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중에서
2021년 코로나 시국이 한창이던 시절 어떤 행사에서 법무부 직원이 차관님 뒤에서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우산을 씌어주는 모습이 포착된 적이 있죠. 시간당 10밀리 안팎의 꽤 많은 비가 내리던 상황에서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우산을 받쳐주던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죠., 이를 본 시민들은 우리나라 법무부 차관님은 "우산도 혼자 못 드느냐" "부모님 보시면 마음 아프시겠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지나친 의전이라고 지적했어요. 우리 네티즌 수사대는 기민하게 각국 정상들의 사진을 공유하며 법무부 차관의 과도한 '우산 의전'과 비교하기도 했어요. 이 사진들 속 각국정상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는 달라도 많이 달랐죠.
이 사진들 속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선 후보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우산을 직접 자기 손으로 들고 비행기를 타는 모습이 담겨있어요. 심지어 각국 정상들이 장대비를 맞는 경우도 흔하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향군인의 날 기념식에서 10여 분간 진행된 행사에서 헌화와 묵념을 하며 내내 우산 없이 비를 맞았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오히려 자신이 참모들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어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찰스 왕세자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국립수목원 순직 경찰관 추모비 건립식 행사에서 손수 우산을 들었어요. 심지어 존슨 총리는 들고 있던 우산이 바람에 뒤집어져 웃고 있는 재미난 사진이 찍히기도 했고요. 아, 마침내 북한 김정은마저 현지지도를 하면서 자신이 직접 우산을 들었고, 60~70대의 군 수뇌부는 비를 맞으며 수첩에 김정은의 지시 사항을 받아 적고 있는 장면도 있어요.
이런 북한을 포함한 세계 각국 정상들의 소탈한 모습과는 달리 우리나라 고위직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의 경우, 수행원들이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 뒤에서 큰 우산을 펼쳐 들고 의전을 펼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죠. 왜 유독 우리나라 관계에서는 이런 지나친 의전 문화가 발달했을까요?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이나 고위직 공무원들은 우산을 직접 들면 큰일이 나고, 우의를 입으면 모양이 빠진다고 생각하는 전근대적이고 불필요한 권위의식과 불필요한 의전을 중시할까요?
공무원 사회에서 지나치게 의전을 중시하게 된 데에는 상명하복의 공무원 조직문화, 과거 권위주의 정부하에서 고착화된 관 우월 의식, 유교문화의 영향 아래 강화된 수직적 가부장 문화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요즘도 고위 간부님들은 모닝커피 한잔도 스스로 타 드시지 못하고, 차 한잔도 스스로 우려내지 못하는 거예요. 공문서 작성에서 전자문서 결재 시스템이 도입된 지 한참이 되었어도 여전히 국 과장님 결재받으려면 한글 파일을 별도로 출력해서 가야 하고, 간부님들은 스스로 이메일도 주고받지 못하는지 꼭 주무관들을 경유해서 메일을 보내면 이를 또 출력해서 전달해야 하는 거죠.
저는 바로 이 과도한 의전문화가 그 '사발면 계장님'과 몇몇 직원들이 P가 보낸 메일을 '무례하다' 혹은 '불쾌하다'라고 느낀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의 무의식에는 이런 과도한 의전 문화에 기반한 예의와 배려가 잠재되어 있었을 거예요. 따라서 7급 직원인 P가 6~5급 직원인 자신들에게 '지나친 간식 비교를 삼가 달라'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이런 의전에 맞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리 말로는 예를 갖췄지만 '무례'하게 느껴진 거죠. 그분들에게 단호한 P의 메일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불쾌하고, 심지어 모욕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공무원 사회에서도 이런 권위주의적인 의전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이 생겨났어요. 게다가 수직적 조직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수평적이고 탈권위적 문화 속에서 성장한 이른바 MZ 공무원들이 공직사회에 많이 유입되면서 이 지나친 의전문화의 문제점이 많이 논의되었죠. 사실, P가 이전에 근무했던 부서인 H과에서는 이런 문화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P도 이분들의 이런 과민반응에 몹시 당혹스럽기도 했던 거고요. 이전 부서에서는 손님이 오면 과장님이 직접 커피나 음료를 꺼내 드렸고, 직원들 어느 누구도 손님들에게 커피를 타다 주거나 하지 않았죠. 또 간식이나 음료도 서무가 알아서 일괄 구입하는 거로 맛있게 먹고, 저녁메뉴도 서무가 주문받아서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었죠.
요즘은 신규 직원들도 서로 직급이 다르더라도 어려워하지 않고 편하게 메신저나 메일로 소통하죠. 국 과장님과도 사내 메신저나 쪽지로 간단하고 신속하게 의견을 묻고 전달하기도 하고요. 예전처럼, 국 과장님이 전화로 주무관을 불러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겠다고 국 과장님 자리로 오라고 호출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수평적 의사소통이 훨씬 효율적이고 신속하며, 이렇게 해도 위계질서가 무너지지 않고 갈등과 분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의 차이가 있으면 정성껏 서로의 진심을 파악하려 노려하고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죠. 강요된 의전이 없어도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기에 겉으로는 비록 무릎 꿇고 우산을 받쳐주지 않더라도 비가 오는 날에는 서로 우산을 챙겨주는 것을 잊지도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