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누구일까 _09
"흰 선 밖으로 나가지 마."
"선 밖으로 나가면 지옥이야."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중에서
결국, 우리 조직의 감사과와 인사과가 무리하게 추진했던 P에 대한 2023년 상반기 부당 전보조치는 번복되었죠. 부당한 인사조치에 대한 저의 강력한 항의, P와의 면담을 통해 연초에 해당과에서 있었던 갑질 괴롭힘의 진상을 알게 된 인사과장님의 숙려 덕분에 말이죠. 그러나 태풍이 지나가면 그 자리에 많은 피해가 남듯이 상반기 감사는 P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무엇보다도 겉으로는 웃음을 가장하며 뒤로는 자신을 쫓아낼 음모를 꾸미던 직원, '용수철 주무관'의 위선과 가식에 대한 분노와 환멸, 조직에 대한 배신감, 스트레스로 인해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어요. 겨우겨우 버텨내던 P에게 조만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었죠. 옆에서 그냥 보고 있기에도 P는 너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불안해 보였죠.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알 수 없었어요. P에게 더 큰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 부당한 인사 조치를 번복시키기 위해서 P는 갑질 괴롭힘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습니다. 갑질 괴롭힘 피해자가 말이죠. 그동안 있었던 그 '사발면 K 계장'과 '용수철 J 주무관' 등 일부 직원들의 괴롭힘을 알리려는 P의 말에 해당과 과장님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죠. 오직 "계속해서 여기 중앙에 남아서 근무하려면 다른 직원들의 불만과 불편함을 너가 이해하고 너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죠. 부서장인 과장님의 이런 말을 들으면서 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죠. 갑질 피해자인 P가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잘 보여야 한다니 얼마나 굴욕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인가요? 그간 해당과에서 자행된 갑질 괴롭힘의 모든 진상과 내막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도무지 부서장인 해당과 과장님의 갈등관리 능력과 리더로서의 자세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중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갑질 괴롭힘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해야 하다뇨! 이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해당과 과장님이나 직속 계장님이 그동안 P에게 자행된 부서 내 갑질 괴롭힘 행위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고, 책임을 규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면 상황은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P를 괴롭히던 그 '용수철 주무관 J'가 또 다른 음모를 꾸미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작은 날갯짓 하나가 거대한 폭풍이 되고,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눈덩이처럼 커져 재앙으로 들이닥치죠. P는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중앙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 그동안의 갑질 괴롭힘에 대한 언급은 자제했죠. 갑질 신고는 생각도 못했고요. 해당과 과장님이나 직속 계장님도 문제를 더 이상 키우기보다는 그 정도의 미봉책에 만족했죠. 이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해 봐야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수고와 희생이 적지 않으리라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태풍은 지나가고 다시 일시적인 평화가 온 듯했죠. 하반기 인사 시즌에 감사과에서 P를 갑자기 다시 부르기 전까지 말입니다.
지난 1년 동안 P에게 일어난 갑질 괴롭힘의 진상을 소상히 알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 이 조직과 P는 숙명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지난 1년이 아니라 지난 10여 년간 이 조직에서 P에게 일어난 일들과 P가 만난 인간들, P가 맺어야 했던 '관계'들을 되돌아보면 왜 이렇게 운명은 P에게만 가혹한 것인지, 도대체 얼마나 장대한 영웅 서사를 준비해 놓고 있기에 아직까지도 P에게는 시련뿐인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제 조금 시간을 내어 그 비운의 영웅 서사, 이 조직에서 지난 10여 년 간 P가 겪은 기이한 빌런들의 잔혹사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전에 곰곰 생각해 봅니다. 우리 조직의 감사과는 왜 무리해서 감사를 벌여 P를 중앙에서 축출하려 했을까요? 편향적으로 갑질 괴롭힘 가해자들의 의견만 듣고, 직속 계장이나 해당과 책임자인 과장님은 배제한 감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직 내 갑질 괴롭힘 피해자를 오히려 '업무 기피자'로 몰아 중앙에서 '퇴출'시키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편향적이고 불공정한 감사를 진행하면서까지 P를 '방출'함으로써 우리 감사과가 지키려던 가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왜 우리 조직의 감사과는 낡은 조직 문화의 한 단편인 구태의연한 간식문화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에 집착하는 사람들 편에 섰을까요? 총장님까지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 이 전근대적 가치를 수호하고자? 영원히 진화를 거부하며 공무원계의 갈라파고스 섬으로 남아 있고 싶어서? 그렇게 변화하는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거나 멸종할 운명일 텐데요?
저는 우리 조직의 감사과가 이번 '간식 이슈'와 여기서 비롯된 갑질 괴롭힘, 그리고 그 피해자를 오히려 감사해서 조직 부적응자로 몰아 '퇴출'시키며 지키려 했던 가치는 다름 아닌 공무원 조직의 전형적인 병폐 중 하나인 '동조 문화' 혹은 '순응주의'(Conformism)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동조 과잉'이라고도 하는데요. 쉽게 말해 한 조직에서 우두머리의 말이나 지시에 토 달지 않고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말해요. 공무원 조직. 관료제에서는 조직의 구성원들이 표준적인 행동양식에 지나치게 동조하는 현상이죠. 이는 관료제 내에서 상관의 지시나 관례에 따라 소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려는 관료들의 병리 현상 가운데 하나예요. 이와 같은 순응주의나 동조과잉은 결국 목표와 수단의 전도, 법규 만능사상, 구태의연한 일처리, 선례 답습주의, 무사안일 주의, 책임 회피, 창의력의 결여 등을 조장해 궁극적으로 조직의 쇄신을 저해하죠.
우리 조직의 감사과가 작년 상반기 은밀히 감사를 벌여 갑질 괴롭힘 피해자인 P를 중앙 조직에서 '퇴줄'하려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순응주의'가 흔들리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이른바 '간식 갑질'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그 문제를 제기한 P를 조직의 위협요인, 불안 요소로 파악했을 거예요. 한번 이 '순응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조직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용기 내어 'No!라고 말할 수 있는 더욱 많은 아싸들이 나타날 것을 우려한 것이죠. 어쩌면 우리 조직의 감사과도 본능적으로 어렴풋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이런 콘포미즘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느꼈을지 몰라요. '소란이 아니라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생각'이 세상을 깨운다는 것을! 그리고 이 순응주의 문화, 과잉동조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직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지옥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