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누구일까 _08
"시간은 거꾸로 되돌아가.
시계, 사람, 기차, 그리고 고양이 모두 거꾸로 움직일거야.
소고기 덮밥은 다시 소로 되돌아 가고, 똥은 다시 엉덩이로 돌아 가.
인간은 원숭이로 변하고, 공룡이 돌아 올거야."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 중에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Galápagos)는 스페인어로 '안장'이란 뜻이죠. 이 섬에 많이 자생하는 거북이의 높게 솟은 등껍질이 마치 안장을 닮았다고 해서 따온 이름이에요. 에콰도르의 영토인데 다른 생태계와 분리, 고립되어 희귀 동식물이 많이 서식한다고 해요. 찰스 다윈이 이곳에서 이구아나, 거북이, 조류 등을 연구해 진화론을 발전시켰죠. 이곳의 동식물은 외부 생태계와 단절되어 진화단계에서 다소 달라진 돋특한 진화의 경로를 걷게 되죠. 그래서 '갈라파고스화'라는 용어도 생겨났어요. 이는 갈라파고스섬이 육지로부터 고립되어 진화의 방향이 달라진 결과 고유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에요. 보통 세계적 표준과 동떨어진 독자적인 행태를 보이는 현상을 말하죠. 그래서 우리 조직을 종종 '공무원계의 갈라파고스섬'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죠.
4월이 되어 예정 대로 그 '사발면 계장'은 국외출장을 나갔고 평온한 일상이 찾아왔죠. 이제 해당과에는 추가 인원이 파견되어 업무도 적절히 분배되어 갈등의 소지도 줄었죠. 연초에 이른바 '간식 갑질' 때문에 다소 불편했던 직원들 간에도 이후에는 별문제 없이 다정하게 웃고 지내고 있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P는 몰랐습니다. 그 고요한 평화 뒤에서 끊임없이 그 '용수철 주무관'의 '음모와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줄은 말입니다. 6월 말 상반기 인사이동 직전에 P는 과장님으로부터 이번 인사이동 시 중앙에서 '방출'되어 S시로 가게 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습니다. 이유는 지난 1월 경 감사과에서 은밀히 P에 대한 감사를 진행해 '해당과 직원들이 P를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문제인물로 전보 심사위에 회부했고, 중앙 내 어떤 부서도 P를 원치 않기에 S시로 방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죠.
인사이동 3일 전에 이런 통보를 받게 된 P는 인사과장님, 해당과 과장님과 면담을 요청해 이런 전보조치의 부당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죠. 처음에는 이미 전보심사위원들이 결재한 사안이어서 번복할 수 없다던 인사과장님은 이번 인사조치의 원인이 된 감사절차나 내용이 부당하다는 갑질 피해자인 P의 말을 듣고 딜레마에 빠졌죠. 감사과는 지난해 1월 초 그 문제의 간식비교 사건과 '사발면 계장'의 이메일 공격, 자유게시판에서의 '댓글 전쟁'이 있은 직후 해당과 초기 멤버 중에 일부만을 대상으로 편파적인 감사를 진행했더군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때 감사과는 P와 친했던 직원이나 직속 계장은 쏙 빼고 '간식 갑질'로 P와 다소 불편한 관계였던 몇몇 직원들만 대상으로 의견을 들어 P가 '자기 일을 떠넘기고, 함께 일하기에 편하지 않다'는 갑질 가해자들의 불만을 접수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간식 이슈'로 P와 다소 불편한 관계였던 몇몇 직원들은 이때 당연히 P에 대한 불만과 괘씸함을 토로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이 간식문제로 오히려 P를 괴롭히고 따돌리고 있었다고는 진술하지 않았겠죠. 간식 문제 때문에 P가 불편하다고 말하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으니 P가 자기 일을 떠넘긴다는 악의적인 프레임을 걸었던 것이고요. 이렇게 갑질 피해자 P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많은 일을 감당했음에도 소위 '업무 태만자'가 됩니다.
P는 인사과장님과의 면담과정에서 이런 자신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편파적인 감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죠. 무슨 유신시대, 5공화국 중앙정보부도 아닌데 감사과는 이런 구시대적 방식의 감사를 벌였던 것입니다. P는 자신의 소명절차도 없었던 감사의 부당성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죠. 저도 인사과장님께 이번 인사의 부당성과 이번 감사 절차의 편파성, 편향성을 알리는 메일을 보냈죠. 부당한 전보조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P는 불안증세와 신경증, 공황장애 증세를 호소했죠. 거의 1주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P가 가장 상처받은 부분은 연초에 '간식 이슈'로 다소 불편했더라도 그 '사발면 계장'이 떠난 이후로는 괴롭히는 직원도 없고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는 여전히 자신을 쫓아내고 싶어 하던 직원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죠. 바로 그 사내정치의 달인 '용수철 J 주무관'말입니다.
직원들이 감사과에 말한 P에 대한 불만 사항은 대체로 'P와 함께 지내기가 불편하다'였죠. 그리고 그 '사발면 계장'이 무리한 업무분장을 통해 떠 넘긴 업무를 P가 수용하지 않았다는 '일 떠넘기는 직원' 프레임이었죠.
심지어 그 혀가 짧은 '용수철 주무관'은 P에 대한 불만사항으로 'P가 다른 직원에 비해 자리를 많이 비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아이들 간의 치졸한 따돌림과 다툼을 통해 관계의 어려움과 미끄러움을 다룬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이 생각났습니다. 도대체 '용수철 J 주무관'은 근무시간에 자기 일은 안 하고 P가 얼마나 자주 자리를 비우는지, 화장실은 얼마나 자주 가는지, P에게 흠잡을 것은 뭐 없는지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상반기 내내 P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지. '용수철 J'가 P에 대한 불만사항을 지적한 대목에는 이런 것도 있었죠. "P가 휴일에도 나와서 일은 안 하고 놀다갔다"는. 저는 이런 것을 불만사항이라고 들어주는 과장님이나 다른 직원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같은 동료 직원들끼리 서로 도와주진 못할 망정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뭐 꼬투리 잡을 거 하나 없나 만 찾는다는 게 같은 동료 직원으로서 할 짓이냐고 오히려 호통을 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P는 무엇보다 그 '용수철 J 주무관'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과 환멸감에 몸서리쳤습니다. 부당한 전보 조치로 그동안 쌓아온 경력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얼마 남지 않은 승진에서도 불이익을 받을게 명백했죠. 그동안 겉으로는 함께 웃으며 다정함을 가장했던 '용수철 J'가 뒤로는 상반기 내내 집요하게 자신을 감시하고, 음해할 궁리를 하고 있었음에 모멸감과 환멸을 느꼈지요. P는 해당과 초기 멤버 몇몇이 가면을 쓰고 자신을 대하고 있었을 알게 되었죠. P와 마음을 나룰 사람은 H과에서 같이 온 전문직 직원과 비슷한 연배의 사무보조 밖에 없었죠. 마치 남태평양의 외로운 섬 갈라파고스 섬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